관리 메뉴

Life of Christian

톰 라이트의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제 4권에 대한 서평(펌글). 본문

생활/영화, 그리고 책

톰 라이트의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제 4권에 대한 서평(펌글).

christianjin 2014. 5. 14. 14:18

N.T.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주저(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에 대한 더글라스 무의 서평 번역


라이트의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을 서평하는 일은 미국세법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일과 유사하다. 1513 페이지(누가복음-사도행전처럼, 2권으로 나뉘어진) 속에서 라이트는 바울신학에 대한 그의 독특한 비전의 윤곽을 그릴 뿐만 아니라(9장-11장), 그의 신학을 발생시킨 그의 세계관을 묘사한다(6장-8장). 그리고 그 작업은 1세기 상황에 맞추어진 역사적 문맥에 기반한 신학에 대한 그의 관점과 조화를 이루며 행해졌다. 그래서 라이트는 도입하는 장을 지나면, 바울이 처한 1세기 정황에 대한 꽤 긴 묘사를 제공한다(네 개 장들은 각각 유대교, 그리스 철학, 그리스-로마 종교와 문화, 로마 제국의 이념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라이트는 교차적 방식으로, 바울의 신학함이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1세기 정황의 현실 속에 있는 길에 접근하기 위해 책의 끝을 향해서 돌아온다. 그 결과로 이 책은 우리가 여태껏 봐왔던 어떤 것과도 다르고, 길고, 복잡하고, 때때로 반복적인, 서평하기에 극도로 힘든 책이 되었다(무엇이 나를 이 작업을 하는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 여러 번 물었다!).

 

                 이 괴물(역자주: 라이트의 책)을 길들이는 시도 속에서, 나는 라이트의 전체적인 방법론과 바울 신학에 대한 그의 개요 속에 있는 핵심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다소 좁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라이트의 관점에 일반적으로 익숙하다고 가정하고, 서술보다는 평가에 더욱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세부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먼저 이 책들 속에서 그가 이룬 것들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다. 라이트가 1세기 세계 안에서 바울의 신학을 위치시킬 때, 이 책이 다루는 놀라운 범위는 신선한 공기 –학자들이 점점 더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알게 되어, 마침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될 때까지 배우는 그런 환경 속에 있는- 속에서의 한 호흡이다(역자 주: 현대의 학문이 점점 미시적인 것들을 다루는 환경임에 빗대어, 라이트가 다루고 있는 범위의 방대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로 보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라이트의 단호한 관심사는- 이것이 그의 모든 저작들에 구석구석 배여 있는 근본적인 가치이며, 그가 주장하기로는,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본질이기도 하다 - 그의 책의 장점인데, 이것은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지금까지 늘 충분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해 왔다.

 

                 물론, 라이트는 위험부담이 큰 사업에 종사하고 있다. 누군가는 라이트가 건드리는 모든 학문적인 분야로부터 그의 실패를 트집잡으려고 이런 저런 소스들을 인용하고, 핵심 본문들에 대한 그의 독법에 반대하며, 아마도 심지어는 그가 그리는 전체적인 그림에 대한 정확성에 대해 반박하는 학자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책에 대해서 어떤 비평을 제공하고 있는 이러한 분야들의 대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아래에서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어떤 비평들은 바울 신학의 문맥 안에 있는 바울 신학의 인상적인 큰 그림- 나 자신 스스로는 결코 그려내지 못했을- 을 창조한 누군가(즉 라이트)를 위한 깊은 감사의 문맥 속에서 설정된 것일 수도 있다.

 

탈주하는 수사적 표현(Runaway Rhetoric)

 

                 라이트의 글 쓰는 스타일은 최근 몇 년 동안 그를 가장 인기 있고, 가장 다작의 학자로 만든 요인들 중의 한 가지인데, 그 경쾌하고, 매력적이며, 신선하게 솔직한 스타일은 이번 책에서도 역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것은 또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수사적 효과를 추구하는 가운데, 라이트는 내가 의심하기에, 그 자신도 역시 기껏해야 과장이었다고 동의할 것들을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을 그의 유대교 맥락에 위치시키는 라이트의 역사적 관심에 대한 묘사 속에서, 라이트는 “옛 관점에 대해서, 바울은 그의 이전의 세계관과 신학과 문화- 옛 상징들, 고대 이야기들, 활용방식,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견해- 에 대한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라고 주장한다(460). 누군가는 단지 “정말로?”이라고 대답하며, 라이트가 이를 다시 검토한다면, 이 진술을 철회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때때로, 이런 수사학적 미사여구들은 잘못된 이분법들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이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은 대개 세계 혹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지칭했다- 이 구원은, 세계 혹은 적어도 한 민족 안에서 악이 더 이상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결코 보통의 고대 이방인들이나 보통의 고대 유대인들 그 누구도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알 수 없는 천국에 이를 수 있는지를 걱정하면서 배회하지는 않았다. (742)"

 

                 나는 다른 예들을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이 책은 너무도 많은 이런 종류의 수사학적으로 효과적이지만, 과장되고, 과도하게 일반화된 주장들을 포함하고 있다. 연관된 문제는 그 자신을 세계에 반하여 설정하려는 라이트의 경향인데-  그리고 나서 그는 왜 세계는 그리도 눈이 멀어서, 그가 보고 있는 것들을 보는데 실패하는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핵심적인 맥락은, 예를 들어, 바울이 다루고 있는 기본적인 이야기가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취와 연관되어 있다는 라이트의 주장이다- 이 치명적인 초점을 “거의 모든 주석들이 놓치고 있으며”, “적어도 위대한 신조들의 시대로부터, 교회의 공식적인 전통으로부터 차단되고 오고 있다는 것이다”. (494) 이 문제는 때때로 그가 동의하지 않는 전통의 풍자와 함께 혼합되기도 한다.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인 서구 구원론” (꽤 넓은 범주이다!)에 대한 그의 비평처럼[754-755])  

 

일관된 형태 (Coherent Shape)

 

                      “바울의 신학”을 우리가 어떻게 적절하게 정의 혹은 묘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행 중인 논쟁 속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듯이, 라이트는 바울이 간헐적으로 썼던 서신들의 구절을 함께 모아서 더 큰 그림(바울의 신학)으로 드러나는 연속된 스냅 사진처럼 다루면서, 바울 사상의 일관된 형태를 식별하기 위해 노력한다. 라이트는 7개의 편지만을 바울서신 뭉치로 보는 학문적 합의에 참신하게도 비판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에베소서, 데살로니가후서, (덜 확실하지만) 디모데후서 (“고통받는 양심에 대한 일종의 양보로서”)를 단지 다른 서신들을 기본으로 해서 도달한 결론들을 확증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며,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지원(support)이 아닌 조명(illumination)”만을 위해 사용한다 (61). 만약 누군가 정확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그는 이 서신들 속에서 드러나는 “깊게 일관된 사상가”(568)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정확한 지점은 바로 바울의 유대교적 유산이다: “바울은 메시야와 성령의 조명 속에서 그의 고유한 유대교 신학의 모든 면들을 다시 고찰하고, 다시 형성했던 철처한 유대적 신학자로 남아 있었는데, 그 결과가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바울 자신의 소명적 자기이해이다(46). 일단 우리가 바울을 아브라함과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야기의 세계관과 역사 속에서의 그 언약의 발전 안에 확실히 위치시키면, 학자들이 바울 안에서 발견하는 일반적인 모든 이분법들 – 묵시론 vs. 구속사; 법정적 vs 참여적 범주; 유대교의 확증 vs. “제 3의 인종”의 창조; 실로, “새” 관점 vs. “옛” 관점 – 은 한쪽 길가로 제쳐진다. 라이트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이야기”로부터 출발해 왔기 때문에, 수세기 이상 바울을 오독해 왔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이 거의 보편적으로 구약적/유대교적 문맥을 바울신학에서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신학이 이야기나 내러티브에 어느 정도까지 그 뿌리를 두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이야기에 대한 틀 안에서 순차적으로 본문을 읽는데, 심지어는 그 본문들이 아브라함이나 언약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읽는다. 확실히, 이런 범주들은 바울의 사상에 근원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모든 곳에서 그것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고 예상해서는 안 된다.  라이트가 기록하듯이, 세계관은 우리가 “향해서” 보는 대상이 아니라 “통해서” 보는 것이다 (462-463). 여전히 나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 혹은, 실제로, 라이트가 바라는 정도로 기초가 되는 그런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특히, 억지스럽게 이 서사구조(narrative framework)가 명백한 본문의 증거(예를 들어 롬:5-8)에 의해서 제공되는 그 틀보다도 더 강조될 때 더욱 그렇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의심할 바 없이 어느 정도까지는 바울의 신학 배후에 존재하지만, 그 “정도”가 그렇게 아주 지대한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나는 바울의 신학이 궁극적으로는 그의 독법처럼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기초해 있다고 확신하지만, 여전히 바울 신학의 특정한 틀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심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기

 

                 그러나 올바른 이야기를 얻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역시 필요하다. 라이트의 신학적 기획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가 했던 방식대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나는 구약의 많은 부분을 바울에게 하찮은 것으로 여겨서 버리길 원하는 “극단적 묵시주의자들” (예를 들어, J.L. Martyn)에 대한 라이트의 비판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라이트는 다메섹 도상의 체험이 “부르심”과 “회심”이라는 이 단어들의 바로 그 의미 그대로, 둘 다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은 라이트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많이 바울이 (구약의)이야기를 재해석하도록 이끌었을 수도 있다. 나는 라이트 버전의 이야기에 대해서 네 가지의 주장을 하려고 한다.

 

                 첫째, 라이트의 익숙한 “유배 중인 이스라엘”에 대한 초점은 반복되고 있는데, 이 관점은 널리 퍼지긴 했으나, 필수적으로 보편적인 견해는 아니다(158). 중요한 것은 바울이 확실히 이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1165). 나는 점차 라이트의 플랫폼 안에 있는 이 항목에 대한 논쟁은 아마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울이 회복 예언들을 통해서 메시아의 오심을 해석하고 있는 그 횟수를 고려해 보면, 우리가 이 회복이 응답하고 있는 그 상황을 “유배” 부르느냐, 아니냐는 것은 그렇게까지 아주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주의: 내가 완전히 이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라이트가 사용하고 있는 “언약”에 대한 단일화된 생각은 바울에게서 그렇게 분명하게 지지받지 못한다. 라이트는 물론,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는 이 하나의 언약 안에 모세와 “새” 언약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3장을 언급하면서, 그는 “그 언약은 이제는 모세법을 소유하거나 듣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작성된 마음의 전환에에 대한 문제이다”(983)라고 쓰고 있다. 확실히, 라이트는 Francis Watson이 강조하였던 모세오경 속에 있는 “두 가지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분별하면서, 이 단일 언약 속에 있는 불연속성을 인식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그의 전형적인 접근에서 어떤 지점에 있어서, 이 두 목소리가 시간적 순서 속에서 위치함을 강조한다(1456-65: “지금 몇 시인가요?”는 치명적인 이슈이다). 그러나 라이트가 인정하듯이, 만약 이렇게 두 기간이 겹친다면, 우리는 실제로는 “역사하는 방식들의” 두 가지 선택 가능한 대안(그가 부인하는 어떤) 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종말론적인 성령의 선물과 함께 하는 새 시대의 그림은(라이트의 단일서사구조: 역자주), 실제로, “문자/영”, “저주/의”, “율법/믿음”에 대한 바울의 대조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그러나 나와 다른 학자들이 주장해 온 논지들을 반복하는 것 만으로도 보통은 충분하다: 아브라함과 모세에 대한 구속사적 대조는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비판의 핵심에 위치해 있는 근본적인 인류학적 대조를 구현한다. (나는 여기서 특히 Stephen Westerholm과, 그리고 또한 그의 고유한 방식에 있어서의 Watson을 떠올린다.)

 

                 셋째, 라이트는 이 책에서(아마도 그의 이전 작품에서 더 많이) 이스라엘 이야기의 소명적인 면, 즉 라이트가 바울에게 분명히 계속되고 있다고 발견한 관점을 강조한다(특히, 롬 2:17-24를 보라). 하나님의 계획에 중심적인 것은 단지 이스라엘을 “위한(for)” 일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though)” 전 우주에 복을 주는 것이다- 이 소명은 결국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변하는 바로 그 이스라엘(“the” Israelite)인 메시야 예수에 의해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교회에 의해서 수행된다. “민족들에 대한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이 역할이 아마도 어떤 버전들의 이야기에 있어서는 축소되어 왔다할지라도, 나는 라이트가 이것을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내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본문들에서 이에 대한 인유들을 찾아내고 있다(예를 들어, 겔 36장; 롬 3-4장[3장2절은 아마도 예외로 보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넷째, 그리고 궁극적으로 칭의에 대한 그의 견해에 있어서 중요하게, 라이트는 제 2성전기 유대교는 “죽음 이후의 삶”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 보다는 누가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이라고 현시점에서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주장한다(4QMMT를 보라; 여기는, 어쨌든, 라이트가 다소 허수아비 증인을 세우고 있는 또 다른 곳이다- 질문은 “죽음 이후의 삶” 보다는 심판에 있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서 더 적절하게 형성된다[Simon Gathercole을 참고할 것]) 바울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묻지 않았던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을 것이다. 라이트에 대한 어떤 비판들과는 대조적으로, 개인의 구원에 대한 “수직적” 이슈는 라이트의 바울 신학에서 실제로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라이트의 “복음”과 칭의와 다른 이슈들에 대한 이해는 바울 자신의 강조에 대비해 볼때, 결국은 정당하지 못한 정도까지 “수평적”으로 치우쳐 있다. 예를 들어, “복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라이트가 이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길 원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바울이 이 단어를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의 통치가 가능하도록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남아 있다. 이 핵심적인 신학 용어를 바울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한 이 균형이 때때로 라이트의 설명에서 빠져 있는 것을 나는 발견한다(“맞아요, 그러나….” 이 패턴이 라이트를 읽을 때 나에게 자주 일어나는 반응이다).  

 

수정된 이야기

 

                  나에게 할당된 글자수를 이미 훨씬 지나버렸지만, 나는 라이트가 바울의 관심에 중심적인 것으로 식별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대한 삼중의 수정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이 세가지 수정은 바울 신학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을 위한 틀을 형성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그리고 성령)의 조명 하에서 새롭게 정의된 유일신론, 재구성된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선택받음, 새롭게 상상된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이다. (깔끔한 정리가 1096-97에 있다: “메시야와 성령에 의해 새롭게 공식화된 고대 유대교의 유일신론, 선택, 그리고 종말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트가 바울 신학에서 다양한 전통적인 주제들로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는 라이트의 일반적이지 않은 자료들의 배열 때문에, 그리고 그는 아마도 같은 주제를 단지 이 장들에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세계관에 대한 다른 장에서 혹은 1세기 세계와의 접점을 다루는 장에서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바울이 신격 안에 예수님을 포함시켰다고 보는 것에 대해서,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과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를 따르지만, 전형적으로, 야훼의 시온으로의 귀환에 대한 구약과 유대교의 이야기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숨겨진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654), 그들을 넘어서길 원하고 있다. 이 주제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나는  라이트의 증거를 좀더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한번 읽어보기로는, 이것이 나를 확신시키지는 못했다. 라이트의 박사학위 논문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다른 강조점에 있어서, 라이트는 바울이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완전히 직함상의 중요성에서 사용했다고 강조하는데, 특히 바울의 프로그램을 위해서 중요한 변화 속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바울이 예수님을 “통합적인 메시아(incorporative Messiah)”- 라이트가 바울이 살던 시대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그러나 거의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바울 안의 아주 많은 것들을 설명하는 – 로 보는 것이다. “시온으로의 귀환” 주제의 중요성이나 바울에 있어서 통합적인 사상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면, 바울의 하나님에 대한 재정의를 다루고 있는 라이트의 챕터가 나는 설득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본 단락을 내가 생각하기에, 정확하게 핵심 포인트를 잡아내고 있는, 성령에 대한 인용으로 마치고자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성령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자주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던 것처럼 이해했을 것이다: 세계관은 당신이 보는 “대상”이 아니라 당신이 “통해서” 보는 것이다. 바울과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성령은 토론되는 어떤 “교리”나 “신조(dogma)”가 아니라, 그 외의 모든 것들을 토론하기 위한(더 정확히는 예배하고, 기도하고, 사랑하고, 사역하기 위한) 지점에 그들을 위치시키는 삶의 호흡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신론에 대한 담론을 포함하는 성령에 대한 담론의 상대적인 부재에 대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710)".

 

                 하나님의 백성은 메시아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는데, 그 메시아는 그의 신실함을 통해서 아담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과업- 처음에는 아브라함에 주어졌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수행하는데 실패한- 을 완수했다. 바울의 유대교적 개념인 선택에 대한 재구성은 그의 구원론으로 들어가는 길이다(912). 구원론의 다양한 요소들 중에서 라이트는 칭의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준다: 그 이유는 그가 칭의의 법정적 언어를 “기본적이고 협상할 수 없는”(1039: “보조 분화구(subsidiary crater)” 견해와는 대조적으로)것으로 여기기 때문임과 동시에, 이것이 계속적으로 논란이 되어왔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존 파이퍼와의 논쟁). 나는 변환이나 최근의 유행어로 “theosis(956-59, 역자주: 신격화, 하나님과의 유사나 연합을 지칭)”로 불리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칭의를 확장시키는 이들에 대항해서 칭의를 엄격하게 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라이트의 명확하고 확신에 찬 견해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라이트는 우리의 확신의 근거이며, 현재 믿음에 의해서 정당성을 입증 받는, “종교개혁 스타일”의 “오직 믿음”으로 표현되는 처음 칭의가 마지막 날에 확증 받게 될 것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한다 (954-55; 1031-32).  라이트는 계속해서 미래 칭의에 대한 강조를 이어가는데, 미래 칭의는 “인도받아 온 삶의 완전성에 따른” 것이며(941; 형식적으로는 “심판”에 대해서. 그러나, 라이트는 분명하게 심판과 미래 칭의를 교체 가능한 것으로 본다), 혹은 “인도받아 온 삶의 총체성에 근거한” 것이다 (1028). 나는 순종에 대한 바울의 강조에 부응하고자 하는 라이트의 열망을 지지하며, 바울에 있어서 칭의의 미래적 측면을 발견한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소한 단어들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미래 칭의가 살아 온 삶에 “따른다(according to)”는 주장에 동의하지만, 살아 온 삶을 “근거로 한다(on the basis)”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또한 라이트가 칭의의 “언약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칭의의 법정적인 면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하며(그는 단호하게 이 둘을 모두 그의 견해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칭의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 대신에, “우리가 어떻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묶음으로써, 바울에 있어서 강조점을 이동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라이트의 작업은 이 사도를 구약과 유대교의 “이야기”에 의거해서 읽는 그의 관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시온으로의 귀환” 주제를 강조하며, 종말에 있어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집중하는데, 이 작업은 로마서 9-11장을 조심스럽게, 단계적으로 해석하는 100쪽 이상의 분량의 할애를 통해 이루어진다(1156-1258). 많은 훌륭한 주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여기에서 좋아할 만한 많은 것들이 있다. 전체 단락에 비추어 볼 때 절정이라고 볼만한 특성은 없는(역자 주: climax of the covenant 는 라이트의 책의 제목인데, 그는 이 단락을 로마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본다), 롬 10:1-13에 나타난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결합되어 있다는 분명한 주장을 가지고, 라이트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날 널리 통용되는 “두 언약”, “후기-대체주의자(post-supercessionists)” 식의 독법을 반박한다. “예수님과 믿음 그리고 구원에 대한 그것의 진술이 나타나는 중심적인 본문인 롬 10:5-13에 대한 잠시의 고찰은 기독론(메시아에 대한 바울의 믿음의 맥락에서)에 확고하고 깊이 근거한 진술 외에 다른 무엇으로도 로마서 9-11장을 읽는 것이 명백하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줄 것이다” (1163). 라이트는 롬 11:26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모든 메시아의 백성을 지칭한다는 그의 논란이 많은 주장을 변호하는데, 자신의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 그리고 비록 나는 납득되지는 않지만, 라이트가 이 장들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씨름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가 만들어낸 주장의 장점을 인식할 수 있다.

 

맺음말

 

                 지면상의 한계가 다른 세부 이슈들에 대한 논평을 허락하지 않지만, 여기서 나는 “역경/해결(plight/solution)” 이슈에 대한 라이트의 논의가 매우 설득력이 있음을 발견했으며(747-50), “후기-대체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비판이 역시 매우 매혹적이다라고 말하는 것 만으로 일단은 충분할 것같다. 다음은 세 가지의 맺음말이다.

1. 라이트는 신학 그 자체가 초기 교회에서 새로운 역할을 감당할 정도로 지위가 높아졌는데, 이는 특히 바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정확히, 바울의 상징세계의 주요한 재구성때문에… ‘신학'은 그의 세계관 속에서, 그 후에는 기독 교회 안에서, 예전에 유대교나 이방종교에서 가졌던 지위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중요해졌다 (403)."

2. 그의 책을 끝맺으면서, 라이트는 “화해(reconciliation)”가 널리 받아들여지듯이, 바울의 신학을 감싸고 있는 가장 중요한 범주로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고후 5:13-6:2을 바울의 중심적인 관심사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본문으로 본다(1488-89).

3. 바울신학의 전부는 궁극적으로 세계 속에 하나님의 목적을 구현하는 공동체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서 설정되어 있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주장해 온 논지는 바울이 정말로 일관된 신학을 통해서 사고했고, 일관된 신학을 분명히 설명했으며, 가르쳤다는 것인데, 그 신학은 진실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와 성령의 은사의 조명아래에서의 “유대교식 믿음의 수정”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공동체들에게 이것들을 통해서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를 배우기를 간청했는데, 그들이 형언할 수 없는 경험들에 직면했을 때의 회피행위(displacement activity)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실재와 그의 목적 그리고 그들이 그 안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한 그들의 이해로서였다. (1327)"

 

*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휘튼 칼리지에 있는 성경 연구분과 Wessner 의장(Wessner Chair of Biblical Studies)이며, 성경 번역 위원회(Committee on Bible Translation)의 의장이다. 그는 신약성경에 대한 수많은 주석들을 써 왔으며, D.A. Carson과 함께 신약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