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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f Christian

톰 라이트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본문

생활/영화, 그리고 책

톰 라이트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christianjin 2014. 6. 26. 19:39


< 이미지 출처 : 갓피필몰 >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 박문재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p1136.

톰 라이트(N.T. Wright) 의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박문재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발간, 이하 RSG )은 그가 계획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혹은 문제) :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 시리즈의 세 번째 권입니다.  


 1 권 :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 The New Testament And People Of GOD

  2014/06/26 - [생활/영화, 그리고 책] - 톰 라이트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2 권 :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2014/06/26 - [생활/영화, 그리고 책] -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본서에서 라이트는 고대인들(유대인들을 비롯한 헬라인들과 주변의 사람들)이 인식했던 ‘죽음’의 개념 그리고 ‘죽음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룹니다.  이러한 내용을 진지하게 다루는 이유는 바로 주후 1세기에 발생한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의 ‘부활사건(빈 무덤과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는 당시의 개혁가이거나 예언자, 혹은 선지자에 그치지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라이트의 입장입니다. 또한 이 입장은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예수의 ‘부활’을 말하기에 앞서,  그들이 가졌던 죽음과 죽음이후의 상태에 대한 이해를 알아야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의 의미를 짚어 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의 방법은 라이트가 계속해서 말해오고 있는 ‘제 3의 탐구’의 방법이며, ‘이야기’가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보는 이야기 속에서 발생한 ‘질문’들에 대해서 ‘상징’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방법입니다.


라이트는 고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무덤 너머의 삶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RSG, p76) 이 명제를 시작으로 그는 성경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헌들을 참조하여 그들이 가졌던 세계관을 추적합니다.


고대세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들은 죽은 자들이 현재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사는 것으로 말했다고 분석합니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은 많은 고대 문화들에서 (그리고 훨씬 후대까지) 죽은 자와 함께 그 죽은 자가 필요할 것이라고 여기는 물품들을 함께 매장하는 관습입니다.(행여나 아내들까지도 매장했습니다.) 다만 차이는 지금의 육신을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몸’까지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서 ‘미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고대 이집트의 죽은 자에 대한 대우에 대해 ‘부활’이라는 개념과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죽은 사람이 죽어 있는 상태로 일정 기간을 지난 후에 몸을 다시 현세의 삶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집트에서의 ‘미라’관습은 모종의 ‘몸’을 입고 ‘살아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미라의 형태로 죽음 후의 몸을 입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입니다.  라이트는 이 주장을  존 데이비스(John Davies)의 주장을 빌어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 머물렀던 헬라-로마의 세계에서는 죽음과 죽음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 호메로스는 죽어서 땅에 누워 있는 육체적인 몸이 ‘자아’이고, ‘영혼’은 멀리 날아가서 기껏해야 반쯤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고 말한 반면에, 플라톤은 영혼이야말로 참된 개인인 ‘자아’이고, 시신은 유령이 된다고 말한다.” (RSG, p98.)


또한 플라톤에게 있어서 몸을 입고 다시 실존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영혼이 다시 한 번 일종의 감옥(몸)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 했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적은 다시 실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윤회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고대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 종종 자연의 주기들 속에서 자기들이 믿는 신들의 ‘부활’을 말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것은 ‘파종과 추수’, ‘인간의 재생산과 다산’이라는 주기를 가진 ‘상징’이었지 결코 그것이 인간들에게 일어날 일로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부활’에 관해 말했을 때에는 그것은 그들의 신인 ‘야훼’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자연주기와 어떤 ‘상징’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반복적이지 않은 이례적인 사건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부활에 관하여 말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음을 말합니다.



라이트는 ‘부활’과 ‘부활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교세계에서 들여온 낯선 것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세계관을 새롭고 다른 환경 아래에서 재표현한 것으로 볼 때 가장 잘 이해된다고 말합니다. ( p158.)


그리고 나서 그는 ‘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표현, 즉 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죽음이후의 표현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역시 ‘이야기’속에서 현실을 발견하며 ‘상징’을 통해 ‘질문’들에 답하는 그의 연구 방식에 부합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열조화 함께 잠잔다’라는 표현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무덤(굴)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방식이 아닌 그 사람이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가서 거기에서 그의 열조들과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방식이기도 했음을 말합니다. 또한 잠자는 자들이 깨어난다는 표현(다니엘 12장)을 통해 그 ‘깨어남’은 ‘내세적’인 관념이 아니라 ‘현세적’인 관념임을 지적합니다. 깨어남과 동시에 사용된 ‘빛날 것이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기사와 연관지어 피조 질서내에서의 영광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은유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 신인 ‘야훼’의 새 창조의 위대한 행위들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에 대한 언어(“일어서다”, “깨어나다”)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죽음 자체의 역전임을 말합니다. 그것은 잠자는 자들이 잠자지 않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것은 묵시론적 해석 안에서 심판도 의미합니다. 즉 이교도들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 새로운 몸의 입는 상당히 변화된 실존에 대한 의로운 개인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라이트는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굉장히 많은 분량을 통해 이야기 합니다.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부활’은 일차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먼저는 바울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부활’에 관해 말합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복음서 보다 바울의 글들이 일부 먼저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문헌들과 복음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예수의 ‘부활’에 관한 내용들을 설명해 갑니다.  그 설명들이 종착되는 지점은 예수의 부활에는 ‘연속성’과 ‘변화’가 함께 있다는 점입니다.  즉 ‘죽은 예수’와 ‘살아난 예수’간의 연속성과 몸의 양식에 있어 분명한 변화를 보인 그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해 발견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야기의 사실성은 ‘부활’에 관한 ‘이야기’와 ‘빈무덤’이 함께 그 ‘사실성’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을 이룬다는 것이 라이트의 주장입니다. (부활, 빈무덤 각각은 필요충분조건을 이루기에 하나씩 부족하지만, 이 둘이 결합을 이룰 때에는 그것을 만족시킴을 말합니다.)


제 2성전 시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에 관하여 생각하고 신앙을 가지고 기도하며 제사를 드릴 때, 그리고 자신들이 신앙하는 그 신이 자신들의 운명을 회복시킬 때를 열망하셨을 때, 그 들이 인지했던 신.  그 신은 풍부한 약속들을 해주었지만 그 약속을 이행하는데는 느리게 보였으며, 이 신은 공의를 열망하였지만 아직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있으며, 이스라엘에 대하여 열정은 지니고 있었지만,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허영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은 세상의 창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이방인들에 의해서 무시되거나 조롱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인가? 그리고 그 동안에 그들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며 그 일들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가 그 모든 것을 답해 준 것으로 대답합니다. ‘부활’은 ‘종말’의 핵심적인 부분이며, 그 일이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여겼던 한 사람에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일이 원칙적으로 이스라엘 전체에 대하여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장소’와 제한된 ‘민족’에게 국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놀라운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는 이 ‘놀람’을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빈무덤을 목격한 사람들,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과도 연관지어 설명합니다.


그는 복음서들의 부활절 이야기들을 통해 아래와 같은 결론을 말합니다.

  1. 부활은 신앙의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로 이동하였다. (본래 ‘부활’의 개념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주변적인 개념이었다.)
  2. 부활은 더 이상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연대기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졌는데, 첫 번째 부분은 이미 일어났다. (예수로 말미암아,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
  3.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소생이 아니라 변화를 내포한다.
  4. 부활언어가 은유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례와 거룩함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세례와 거룩함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


이러한 결론을 위해 예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메시아 관도 설명을 합니다.  이 변화된 메시아관은 유대교적인 메시아 신앙의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 신앙이 시편들, 예언서들, 성경의 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도 이 특성들 인종적(민족적) 특수성에 두지 않았습니다.


  1. 메시아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었다. ‘메시아적 전투’는 그 성격이 바뀌었는데 메시아는 군사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 그 자체와 대결한다. 
  2. 재건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3. 메시아가 세상에 가져올 공의, 평화, 구원은 로마제국의 꿈의 유대적인 판본이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의 갱신을 통해서 세상에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공이,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구원이다.

모든 것은 예수를 중심으로 재정이 되었음을 말하며, 라이트는 본서를 통해 그것을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다만, 책의 서두에서 죽음이후의 이후의 시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 놓고서,  육체의 죽음과 ‘부활’의 간격을 두고 있는 상태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는 미흡한듯 하여 조금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물론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은 앞으로 변화될 것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것을 미도 따르는 이미 ‘변화되기 시작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그 모든 것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마지막 책은 제가 잘 이해를 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고 여겨져 다시 한 번 훓어 봐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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