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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베이커, 조엘 그린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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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베이커, 조엘 그린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christianjin 2014. 7. 2. 11:35



<이미지 출처 : 죠이선교회>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 마크 베이커(Mark D. Baker), 조엘 그린(Joel B. Green) 공저, 최요한 역, 죠이선교회 ~ p337.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이야기를 잘 전할 수 있을까에 관한 책입니다.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른 지점에서 적어놓은 아래의 문단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복음이 되려면 현지 환경에 맞추어 특정 상황의 거주자들의 생활 양식과 가치와 통합적인 관련성을 지녀야 한다.” p333.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현지 환경’과 ‘특정상황의 거주자들’은 지역적인 것 만에 국한되지 않고 시대적인 차이도 이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내에서 저자들은 그동안 전통적으로 알고 있고, 믿어왔던 ‘속죄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합니다. 



전통적인 ‘속죄론’은 그들의 눈에는 부정적으로 비췹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형벌’, ‘보상’, ‘대속’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의 말을 빌어, 만일 ‘분노’하고 ‘원수를 갚는’ 가부장적인 성격의 하나님을 우리가 그려낸다면 실제로 억압적인 방식을 취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하여 변명이 되며,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그 예로  데이비드 뱃스톤(David Batstone)의 검토를 빌어,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으로 자기 운명에 복종하는 고난받는 예수 상을 본받았어야 했던 아즈텍, 마야, 잉카인들과 반대로 왕국을 정복하고 통치하는 그리스도를 본 받고 실현하려 했던 스페인의 통치를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책에서는 이 예를 앞에서 이야기하고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의 의견을 나중에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속죄론’은 거의가 성경자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 이후의 해석들에 의존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들은 당연하게도 해석자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맞춘 은유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속죄론은 ‘안셀무스’에 의해서 정착 된 것들인데,  안셀무스가 살았던 중세봉건사회는 ‘명예’, ‘보상’, ‘상호적인 책무’를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러한 맥락에서 표현된 ‘속죄’에 대한 ‘은유’라고 말합니다.  저자들은 안셀무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채무의 탕감이었다고 정의하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죄의 문제는 ‘영주와 봉신의 관계’속에서 이해된다고 말합니다.(p195) 


‘패커’나 ‘하지’의 경우에도 결국은 안셀무스가 말하는 것에 발전을 한 ‘형벌대속론’으로 말하며, 이는 서구사회의 영향을 받은 우리 사회의 형사, 사법제도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지는 ‘형벌’, ‘속죄’의 개념임을 주장합니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저자들은 ‘형벌’로서의 ‘대속’은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한 것으로 여기며, 구약성경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타당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성실함’이며 ‘칭의’는 단순히 ‘무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받아들이시는 이유는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그들의 죄가 말끔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p226)


이들은 ‘새관점’이라 불리우는 현대적 신학관점을 따르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윗문단의 말만 하더라도 뭔가 석연치가 않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칭의’가 ‘무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곧바로 그 이유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이 ‘개인구원’의 초점에 맞춰져 있고, ‘공동체’에 대해서는 부족한 의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속죄’를 ‘개인의 무죄’영역에 국한 시키지 않고, 공동체로서의 회복,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 관점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시대와 상황에 맞는 표현으로 ‘보상과 대가’보다 공동체로 부터 소외 당하는 ‘수치심’이 더 큰 문제인 ‘일본’의 상황을 묘사함으로 서구적 형벌의 개념이 아닌 공동체적 개념으로서의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는 것은 적절한 예시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일본의 ‘와,和’사상 때문입니다, 필자 주)  


개인적으로 저자들의 주장과 논지는 많은 부분 공감이 되며, 때로는 가슴 깊게 와 닿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 해 가는 방식이 현재로서는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물론 저자들은 ‘속죄신학의 전통’을 존중해야 하지만, 단순하게 과거에 정립된 ‘속죄사상’을 답습하는 것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전통적인 ‘속죄사상’을 완전하게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환경과 특정 상황에 ‘복음’을 전할 때 서구적 세계관의 ‘속죄사상’을 전하는 것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안셀무스를 비롯하여, 패커, 하지가 말한 ‘형벌대속론’이 아닌 ‘성경적 이해’를 말해 줄 법도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단지 ‘새관점’ 적인 입장을 말하고,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의 의견을 말하고,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는 그 시대의 ‘은유적’표현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시대와 상황에 맞는 ‘은유적’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지는 ‘의미’자체보다는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며 그 동안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속죄에 대해서만 반박하는 형식을 취하는 방식이 그다지 좋은 방식은 아닌 듯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필연적으로 ‘부활’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수치스런 죽음(이 표현은 저자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던 것이라면, 예수 당시의 다른 혁명가들의 죽음과의 차별을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자들은 ‘부활’에 관한 것을 다른 이들의 논지에 반박하기 위한 지엽적인 방법으로만 언급을 하지,  ‘복음’을 전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현지의 환경과 특정한 상황에 맞추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개인구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구원’의 측면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성경본문으로부터의 연구가 미비한점,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을 개진하는 방식에 있어서 기존의 전통적인 이해를 부정하기만 했다는 점,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해가 없이 ‘십자가’만 가지고 논지를 전개해간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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