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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파이퍼 "칭의논쟁" 간단리뷰 본문

생활/영화, 그리고 책

존 파이퍼 "칭의논쟁" 간단리뷰

christianjin 2014. 8. 5. 16:58

< 이미지 출처 : 갓피플 몰>


칭의논쟁
THE FUTURE OF JUSTIFICATION

: 존 파이퍼 (John Piper) “칭의논쟁 :The Future of Justification” 신호섭 역, 부흥과개혁사, p298. (299~345 는 ‘부록’)


어제 톰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에클레시아북스)를 읽은 후에 존 파이퍼의 “칭의논쟁”을 곧바로 펼쳤습니다.  존 파이퍼는 과연 무엇 때문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칭의에 대해서 위험성을 발견하였고, 어떠한 것은 문제로 삼았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자신의 책 “칭의를 말하다”에서 부분적으로 존 파이퍼의 말을 언급은 했지만, 책 구성 자체가 존 파이퍼가 지적한 점 자체에 대해 하나하나 대답하는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심도 있게 전개해 가는 방식이었거든요. (성서본문의 주해는 자기의 주장을 전개함과 더불어 파이퍼의 주해와의 차이점을 말하기 위해 동일한 본문을 주해 하기도합니다.)


"칭의를 말하다"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2014/08/04 - [생활/영화, 그리고 책] -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간단리뷰


파이퍼는 라이트의 주장과 진술에는 모호성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논지 자체만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파이퍼가 보기에 모호한 진술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혹은 개혁주의적) 교리들과 다른 점들이 발견된다는 것이죠.


우선 파이퍼는 라이트의  ‘복음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며, 칭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및 반박을 합니다.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를 보면 라이트가 아래와 같이 주장을 하기 때문이죠.


“ 칭의는 그저 ‘내가 나의 죄를 용서받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의 성령의 능력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 가족을 창조하시는가에 대한 것이다.” (‘칭의를 말하다’, p335.)


기본적으로 ‘칭의’와 ‘죄사함’ 그리고 ‘구원’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파이퍼는 자신의 책에서 계속해서 라이트의 주장들에 대해 반박을 합니다.


게다가 라이트가 계속해서 주장해 왔던 성서의 저자들은 1세기의 유대적 배경내에서 사용되던 사상와 언어용법(단어사용 등)의 배경내에서 성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유대적 배경 및 사상 그리고 언어의 용법들을 알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일반적으로 성경 이외의 문헌은 성경 자체보다 덜 연구되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경에 적용하는 문맥적 인식과 일치되지 않기에, 신양성경 저자들 보다 부차적인 1세기 원전 자료들을 해석하는데 자신감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p45.)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파이퍼는 ‘칭의’와 ‘죄사함’을 동일시하며 또한 그것에 구원에 대한 설명임을 말합니다.  하지만, 라이트는 ‘칭의’를 ‘구원’의 전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을 설명하는 한 부분일 뿐임을 주장하죠. 그래서 라이트는 “칭의를 말하다”에서 자신은 ‘칭의’를 ‘구원’의 전부를 말하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자동차의 비유를 듭니다. 즉 ‘구원’을 ‘자동차’로 비유한다면 ‘칭의’는 ‘핸들’과 같은 것이지만, 핸들 자체가 ‘자동차’ 전체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파이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오히려 칭의는 부르심과 함께 본질적으로 구원적 행위입니다.” (p62.)


칭의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전제에 이런 차이가 있으니 서로의 주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나님의 의” 대해서도 파이퍼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라이트는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서의 의”로 말하죠. 그래서 ‘칭의’라는 법적언어를 설명함에 있어서 파이퍼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완전한 신분의 변화(물론 아직 삶에 있어서 완전함이 드러나진 않지만)된 것임을 말하고, 라이트는 전가를 통해 그 속성을 부여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태임을 선언해 주신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라이트는 결국 이 ‘칭의’를 ‘하나님의 언약’안에서 설명을 합니다. 


이에 대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의 의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은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지 않으며, 하나님의 신적인 의가 무엇인지는 다루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에만 머무릅니다. (중략)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의’가 수행하는 몇 가지 일에 대한 것들뿐입니다.” (p90-91.)


“ 하나님의 구원적 행위의 동기는 언약적 신실하심보다 훨씬 깊은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즉 그의 확고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p96.)


파이퍼는 반복해서 라이트의 ‘모호성’을 지적합니다. 


“칭의를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라이트의 진술에는 오해하게 만드는 모호성이 있습니다. 이 모호성은 바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지는 정의하지 않고 남겨 둔다는 점에 있습니다.” (p130.)


제가 이해하기로 두 사람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톰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 정의하며, 그 신실함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의롭다고 선언합니다.   파이퍼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의(신적인 의)로 정의하며 그 신적인 의를 전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의로운 존재로 만듭니다. 

  2. 즉 톰라이트에게 있어서 ‘칭의’는 하나님의 인정하심(선언) 이고 파이퍼에게 있어서 ‘칭의’는 실질적 자격부여입니다. 

  3.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라이트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신실함(의)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의를 선언해 주셨다는 것이고(선언적 상태), 파이퍼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신실함에 따른 신적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상태(실질적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Justification 이라는 단어가 영미권에서 어떤 뉘앙스를 풍기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것을 한문식으로 표현한 ‘칭의(稱義)’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면 ‘의롭다고 일컬음’이니 한문적 표현은 실질적 의인의 상태가 아닌 선언적 상태로서 라이트의 견해와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전가’의 개념을 생각해 본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겠죠. 


파이퍼가 라이트를 비판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비판이라기 보다는 우려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라이트에 대한 그의 우려는 다음의 문장에서 잘 드러나있고, 이 문장의 내용이 결국 파이퍼로 하여금 본 서를 쓰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라이트의 우물에서 흘러나오게 될 복음 설교는 아마도 그것에 우주적 범위의 성격을 부여하겠지만, 인간의 마음 내부에 존재하는 죄를 인격적으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죄를 처리하셨고, 두려움에 휩싸인 영혼이 어떻게 은혜의 복음 안에서 즉 하나님의 칭의의 행위로 말미암아 마르지 않는 능동적인 은혜 안에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p154-155.)


라이트의 “칭의를 말하다”가 본 책 “칭의논쟁”에 대한 답변서라고 하니 책읽기의 순서를 거꾸로 한 저는, 순서대로 읽는 것이 더 좋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별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두 책을 같이 읽어보시면 여러모로 유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제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두란노)를 읽으러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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