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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관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 간단리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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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관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 간단리뷰

christianjin 2014. 8. 28. 17:35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소멸의 자연학


: 박성관 저, 그린비, 2010. ~p919.



목사로서 교회내의 교우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가끔 ‘진화론’에 관한 이야를 나누곤 합니다. 그런덴 생각해 보니 여기 저기에서 파편적으로 들은 이야기만 알고 있었지 정작 진화론에 대한 책 한 권 제대로 읽은 기억이 없더군요. 부끄럽게도 말입니다. 


그러던 중 교회의 형제님 한 분께서 이 책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냥 진화론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론과의 비교, 성경이야기를 인용하여 설명 하기도 하는 등 흥미로운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경도(東京都) 요쯔야(四ッ谷)에 있는 한국문화원에가서 이 책을 빌렸습니다. 어차피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요.


일단은 900여 페이지나 되는 책의 두께에 꽤나 겁을 먹긴 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잘 읽어나갔습니다.


본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 대한 해제집같은 책입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챕터대로 장을 구분하였으며, ‘종의 기원’의 장별 내용을 소개 및 설명하면서 내용을 진행해 나갑니다. 


저자는 먼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의 정보로 과거의 다윈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다윈이 말한 주장들이 지금에 있어서는 당연한 이야기들 처럼 여겨질지라도, 그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획기적인 발상들이었으며(물론 과학자들이 이미 동일한 연구들을 하고 있었고, 그 연구의 결과들 위에서 발전된 이야기들이라 할지라도), 종교적 배경 속에서 창조론의 세계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을 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읽어가기 전에 당시의 상황을 염두해 두면서 읽을 것을 요구합니다. (최근에 제가 계속 공부하고 있는 한 신학자가 제시하는 성경읽기 방식과 비슷하네요!)


결국 다윈이 발견하고 말하는 것은 ‘변이’인데, 이 ‘변이’는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유전에 의한 것만도 아니요, 또한 환경에 이끌려 적응하는 과정속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님을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는 다윈이 말하는 ‘자연선택’을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해석하여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이끌려 적응하는 것도, 고등한 종이 남고 그렇지 않은 종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사건들로서의 ‘자연법칙’ 속에서 이뤄지는 서로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적응하는 것들이 살아남게 되고 생존(보존)하게 됨을 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자연스러운 선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때때로 어떤 종들은 희소화되는데, 이 희소화는 곧 멸종의 전조이고, 또한 희소화가 되기 전이나 희소화가 되는 과정에서 형질분기(형질들이 뚜렷하게 구분)를 통해 서로 달라지는 현상들이 나타남을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한 종류의 출현과 증식은 다른 종류의 희소와 맞물려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책 속에서 저자가 하는 말을 봅시다.


“ 모든 생물은 이른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적절한 생태적 지위를 차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만약 어떤 종이 그의 경쟁자와 비슷한 정도로 변호, 개량되지 못한다면 그 종은 당장 소멸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p267.


“ 서로 달라지는 것, 그리하여 한 없이 다양화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우며 선한가?” p291.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이 책의 내용을 단지 ‘자연과학’의 내용으로서 ‘진화론’을 설명하는 것으로만 채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종의 기원’이 결국에는 ‘세계관을 축약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다윈의 ‘종의기원’을 설명하고, 그 학설의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하는 것으로 채워지지만, 저자는 중간 중간 세계관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인간의 사유,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 역사 등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은 ‘자연과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회와 역사에도 그 세계관이 미쳐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자가 하는 말을 좀 더 보겠습니다. 


“ 지금까지의 얘기를 사회나 역사에 적용시켜 생각해보자. 인류가 거쳐 온 시간들을 눈 크게 뜨고 되돌아 보라. 거기에는 점진적 개선도 있었지만 급격한 혁명도 있었다.  현 제체를 전제하는 어떤 개선에도 대중이 만족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게 바로 혁명 아니던가! 물론 혁명은 어떤 초자연적인 요소도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극히 자연스롭고도 연속적인 과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점진적 변화들의 누적과 구별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실제 현실에서도 저진적인 개량파와 급직적인 혁명파가 격렬히 대립하지 않는가? 결국 사태는 소규모 개선이나 전보다 더한 반동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전혀 새로운 혁명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것도 현실적인 사태다.  (중략) 자연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혁명과 전개 양상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혁명도 이전의 성과가 없으면 일어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연속적이다. 그러나 혁명은 그런 성과들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은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을 미증유의 방식으로 충돌시키고, 결합시켰을 때에만 발생한다.” p844-845.


저자가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빌어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다윈이 우리네의 ‘인간중심’적 사고 ‘목적론’에 대해 반대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다른 모든 것들에 비해 우월하거나 전혀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이 자연세계(우주)의 일부이며 그 자연세계 속에서 이워지는 일들 속에서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저자는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강조합니다. 자 자연과 자연을 이루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변이’가 일어나고 그 ‘변이’로 ‘적응’하며 다양화되어 존재하게 됨을 말합니다.


다윈의 ‘종의기원’의 내용은 결국 종교적 신앙,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신앙의 내용과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오늘날 지적설계론을 말하며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거나, 더 나아가 진화할 수 있는 원시종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게끔 만듭니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말합니다. 


“그는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이 "어째서 사람들의 종교 감정을 뒤흔드는지"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중략) 신자들도 신께서 "스스로 발달해 다른 유용한 생물이 될 수 있는 소수의 원시적은 종류를 창조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상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진화론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창조론의 숨을 이어가기 위한 마지막 승부수다. (중략) 자연선택과 진화를 모두 인정하는 창조론자라면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과 (대멸종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들의 소멸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두가 신의 사업이어야 한다. 신이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고 그것이 신의 섭리요 뜻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전지전능한 존재도 아니고 선한 존재는 더더욱이 될 수 없다. 진화를 부정하면 현실과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진화를 받아들이면 신의 중요한 속성들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 다윈은 창조론과 목적론과, 인간중심주의를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다윈은 자기 견해가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흔드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실은 그 이상이었다. 그는 창조론만이 아니라 서구 통념 전부를 으깨 버렸다.” p870-871.


개인적으로 저는 ‘창조론’을 믿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든 생각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진화론과 관련하여 파편적으로 접한 소량의 정보 가지고 마치 그 전부를 아는 것 처럼 굴지 말아야 겠다는 것이었고, (어디 진화론 뿐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중심, 목적론을 반대하고 인간을 우주의 일부로 보는 사고 속에서 ‘진화’는 자연세계(우주)와 그 속에 살아가는 것들과의 상호관계라는 측면입니다. 


이 ‘상호관계’라는 것이 저에게는 참 크게 다가왔습니다. 


요즈음 신학계에서도 창세기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다스려라”라는 명령이 지난 날 많은 부분 오해되어 왔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억압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닌 보존하고 지켜내는 것으로 재해석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요즈음 관심을 갖고 읽고 있는 신학사조인 ‘새관점’에서도 인간의 구원도 ‘개인적 구원’이 아닌 ‘우주적 구원의 일부’로 해석하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아픔은 인간의 잘못된 우월의식으로 인해,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세계와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중심, 개인화, 이기주의 이 모든 것들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들에 대해 도외시 하게 했고,  더불어 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잊게 함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사회를 고통스럽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진화’를 ‘자연세계’와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며 인간 역시도 ‘자연세계의 일부’임을 말해주는 이 책은 저에게 꽤나 긍정적으로 읽혔습니다. 


많은 부분 다윈이 말한 것에 대한 과학적 논증으로 내용이 채워져 있지만,  그러한 논증의 내용은 뒤로하고, 저자가 세계관을 축약한 그림으로서의 ‘종의 기원’이라고 정의하며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짧게 리뷰를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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