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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간단리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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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데이비슨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간단리뷰

christianjin 2014. 9. 1. 20:44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 TO CHANGE THE WORLD

: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 To Change The World” 배덕만 역, 새물결플러스, 2014, ~p500. (p423~500은 주, 참고문헌, 색인)



대한민국 사회는 분열과 분노로 가득차 있는 듯이 보입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사건이 발생한 이후 이러한 현상은 누구라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가시적으로 드러났으며 대한민국 사회의 맨언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금의 현실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가운데 새물결플러스에서 참 좋은 책이 출간 되었습니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가 그것입니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이하 '저자')는 그 동안 기독교내에서 세계관/가치관을 논하며 문화영역을 ‘기독교화’해야 한다는 주장들과 움직임들이 얼마나 피상적이며 가벼운 것들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은 문화와 문화적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근본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지적합니다. 그 왜곡은 바로 세상을 이원론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세계관의 이원론은 자연스럽게 세상 속에서의 기독교의 몇 가지 입장을 만들어 냅니다.


그 몇가지 입장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전에 기독교가 미쳤던 영향들에 대한 것들을 분석하여 제시합니다. 종교개혁, 각성운동, 반노예제 개혁, 부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것들이 성공했던 것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신앙, 세계관, 문화에 요인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학적/영적이지 않은 요인들 때문에 성공한 것으로 분석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측면입니다.  이 논의를 이야기 하면서 저자는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부터 이야기를 합니다.  헬라어에 능숙한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회당을 중심으로 세워진 초대교회, 로마의 지배계층을 통해 이뤄진 기독교, 중세의 지배계층에 의해 이뤄진 수도원, 그리고 일급학자들(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뤄진 종교개혁시대 등 이 모든 것들은 상위계층을 중심으로 사회(문화), 정치(계급), 경제(물질적 후원)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진 일들이라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그 이후,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르러 교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사명의 완수를 위해 사회(문화), 정치(계급), 경제(물질적 후원)의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받으려 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딜레마는 바로 이 사회/정치/경제에 끼칠 영향력을 위한 권력의 부분입니다. 저자는 이 ‘권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는 것은 건강한 대안이라기 보다는 후기 근대문화의 최악의 요소들이라고 말합니다. (p150.)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 나는 창조 명령에 대한 최고의 이해는 세상 자체를 바꾸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중략) 이런 종류의 세상변혁과 관련된 대부분의 논의가 역사를 통제하겠다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 사상의 전제는 사람들이 인간적 사건들 속에서 그런 계획들을 실현시킬 만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하지만 우리 문화에서 그 가정은 항상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p150)


권력의 추구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성향을 오늘날 고지론, 청부론으로 표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는 결국 ‘이념’의 구분을 낳게 했고, 또한 이것은 정치적인 입장, 행동들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서로 다른 이념에 의해 (저자는 이를 ‘신화와 역사에 의한 정치적 입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세상 속에서의 몇가지 입장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 가 그것입니다.


보수로 표현될 수 있는 기독교 우파는 사회의 질서와 도덕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고, 진보로 표현될 수 있는 기독교 좌파는 정의, 평등, 공동체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저자는 비록 입장은 다르지만, 기독교우파와 좌파는 모두 의로운 제국을 열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정당화 하기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신학과 국가적 이해와 정체성을 혼동하는 것에서 이 둘은 서로 비슷하다고 지적합니다. (p225.)  신-재세례파의 경우에는 국가와 다른 권세들을 반대하는 입장임을 설명합니다.  


“ 기독교 우파의 정체성이 대체로 세속주의와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통해 형성되고, 기독교 좌파의 정체성이 우파에 대한 그들의 반대로부터 기원한다면, 신-제세례파의 집단적 정체성은 국가에 대한 반대, 그리고 후기 현대사회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반대를 통해 형성된다. 그들의 정체성은 국가와 다른 권세들의 타락에 의존한다. 그것들이 더욱 확실히 부패할수록,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은 더욱 분명해진다.” (p249.)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지적합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인해 다른 입장이 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분노’에 의한 것이며, 그 분노는 결국 지배의지를 불러일으켜 ‘권력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분노’의 발생 원인은 입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혹은 자신들이 바라보는 세계관 속에서 발생되는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이들의 신학은 세상을 혐오하는 신학이며, 그 세상을 향한 혐오 (이 혐오는 이원론적 사고/세계관/신앙에서 비롯 된 것이겠죠) 는 외부에서 볼 때 그렇게 긍정적으로 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권력추구(영향력을 위한) 일련의 행동들과 입장들은 외부(타자)를 위한, 그들의 필요를 위한 봉사와 참된 영향력이 아닌 그들을 반대하는 분노가 깃들여 있음으로 나타나는 야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그리고 신-제세례파로 대표되는 기독교적 입장은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저자는 이를 “~에 대한 방어”, “~에 대한 적합성”, “~로부터의 정결”로 설명합니다. 


“~에 대한 방어” 의 방식을 따르는 기독교 우파는 대체로 세계의 주된 문제가 세속화라고 믿음으로 자신들이 따르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적들(진화, 공산주의, 포르노, 낙태, 페미니즘, 동성애 등)을 향해 직접적인 공격들을 행합니다.

“~에 대한 적합성”의 방식을 따르는 기독교 좌파는 신앙의 방어보다 동시대 문화와 적합하게 연결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에 대한 정결”의 방식을 따르는 신-재세례파는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생각에서 교회의 핵심과제는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출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저자는 위의 세 입장 모두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의 모든 입장들은 ‘긍휼’이 아닌 ‘분노’,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그리고 사회에 끼칠 영향력을 위한 일종의 권력의지로부터 나온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것들은 옳지 않음을 말하며  위와 같은 정치적 입장이 아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실한 내적 현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인간들의 어떤 방식으로 이뤄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구현하며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것을 ‘성육신’과 관련지어 추구(찾음), 동일화, 희생적 사랑을 통한 생명의 제공이라는 구분으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임재가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 그리고 영향력의 범주 안에서)에서 타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그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기 위한 ‘신실한 내적 현존’이 실현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우리는 타인들을 찾아야 하며, 타일들과 동일시해야 하고, 희생적 사랑을 통해 타자들의 완전함을 위해 수고해야 한다.” (p363.)


저자는 이렇게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기독교)의 영향력을 ‘성육신’의 개념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위임령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위임령의 차원은 지역적 개념이 아닌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합니다.) 


최근들어 제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체제(system)와 어떠한 방법론들이 외부적 장치가 되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자체’가 아닐까요?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정치적’이 아닌 ‘성육신’의 관점으로 이해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입장은 저에게 꽤나 긍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종교적”인 방식이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 되어 사회체제를 바꾸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닐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일 어떤 체제의 변화, 정치적 영향력 등이 아니라 단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영향력의 범주 내에서만 그리스도인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작금의 한국사회를 바라볼 때,  그렇다면 불의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까라는 생각입니다.


오랜시간 단식을 하며 세월호 특별법을 외치던 김영오씨, 지금도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하는 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는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분들을 볼 때, 분명 그 분들은 억울한 일을 당한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한 ‘긍휼함’을 가지고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아닐진대 많은 경우 그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핸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일련의 행동들도 ‘분노’로 말미암은 ‘권력의 추구(정치적 영향력)인 것이가라는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지금의 생각과 많은 행동들은 ‘긍휼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긍휼함’에서 분명 ‘분노’로 확장 되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찾고, 동일시 하는 부분은 조금은 보여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찾고, 동일시하는 가운데 어떤 희생적 사랑을 통해 그들에게 생명을 전할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찾고, 동일시 하는 그 자리 속에서 이미 희생적 사랑이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느 때라면 이런 생각이 덜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끝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체제적 불의함이라 여길만한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해 있는 이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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