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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f Christ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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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맥나이트 '예수 왕의 복음' 간단리뷰

christianjin 2014. 9. 8. 19:33


< 이미지 출처 : 갓피플몰 >


예수 왕의 복음
: KING JESUS GOSPEL

: 스캇 맥나이트 (Scot McKnight), “ 예수 왕의 복음: King Jesus Gospel”, 박세혁 역, 새물결플러스, 2014, ~p289. (p291~298은 주)


‘복음’과 관련하여 오래 전 부터 들어온 이야기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오직 그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언 앞에서 신앙공동체에서는 예수를 믿기로 하는 개인적 결단을 요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 왔었죠.


하지만 정작 예수를 믿기로 결정하고 신앙공동체 안에서 생활하기로 했을 때에는 예수를 믿기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예배, 봉사(헌신), 헌금, 전도, 교제 등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여러가지 것들을 요구합니다. (물론 올바른 내용이 아닌 종교생활로서 요구하는 일들이 많기에 오늘날 이에 대한 성찰이 많아지고 있기는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더니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할게 많은 것인가? 차라리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예수를 믿는 것이 더 나은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도 있는 듯 합니다. 


혹자는 이러한 의구심에 대하여 구원의 조건과 구원의 결과를 언급하며, 구원의 조건은 오직 예수를 믿는 것 뿐이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결과로 우리는 그러한 예배, 봉사(헌신), 헌금, 전도, 교제 등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경우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은 개인적인 영역일지 몰라도 ‘신앙생활’은 공동체적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구원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영역’에 둔 ‘개인구원’에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개인구원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정작 그 후의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요구들과 방법론등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들어 신학계에서 ‘새관점’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조와 학파에 속한 학자들의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글들을 읽으면서 발견하는 것은 그 동안 우리가 생각해 오던 인간중심의 구원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구원을 계획하고 계시고 그 속에 우리 인간들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임을 말하는 듯 합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출간한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 이하 저자 혹은 맥나이트)의 “예수 왕의복음”도 이러한 견해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실재로 많은 부분 N.T. 라이트의 견해를 소개하거나 따르고 있으며, 라이트는 이 책의 서문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맥나이트는 그 동안 ‘개인구원’에 의해 ‘복음’이 왜곡되어져 왔으며, 그로인해 사도들이 이해했던 ‘복음’의 내용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p38.)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개인구원에만 머물러 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본격화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무게중심을 인간의 반응과 개인적인 책임쪽으로 이동시켰으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구원론’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죠. (p111-112)


맥나이트는 오늘날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있는 ‘구원론’이 되어 ‘개인구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구원계획’이라는 용어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계획’은 ‘복음’의 일부이지 결코 ‘복음’과 ‘구원계획’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이 구분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이야기(성경이야기) / 예수님의 이야기 / 구원계획 / 설득의 방법 이라는 네가지 영역을 구분하여 각 항목에 대해 설명하며,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복음전도’를 ‘구원계획’ 속에서 행하는 ‘설득’으로 설명합니다.


“ 사도들의 복음전도는 응답을 촉구하는 담대한 선언인 반면, 오늘날의 전도는 대부분의 경우 교묘한 설득이다.”  (p216)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예수로 성취되는 모든 이야기”라고 정의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이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포함한 예수의 탄생과 삶 전체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예수가 메시아(그리스도)로서, 구원자로서, 아들로서의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예수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물론 저자가 구분한 ‘구원계획’은 이 예수의 이야기 속에 포함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구원계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계획과 복음이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과정을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고, 알리고, 선언하고, 크게 외치는 것임을 말합니다. (p78.)


그는 N.T. 라이트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복음>자체는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서술적인 선포다.’ ‘혹은 더 간단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바울에게 <복음>의 핵심은 거짓 신들에 맞서는 참 하나님에 관한 선언이다.” (p91.) (물론, 저자는 이 주장과 다른 이들의 주장을 비교하며 어느것이 맞는 이야기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에 저자는 라이트의 견해를 따릅니다.)


그는 참 복음전도와 구원계획만을 전하는 복음전도의 차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복음전도는 메시아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구원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선언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메시아이자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촉구하는 반면, 우리의 복음전도에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한다.” (p215.)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예수로 성취된다는 것은 어떤 내용일까요? 저자는 이 내용을 240페이지에서부터 248페이지에 걸쳐 간단하게(?) 정리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재차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피조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위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저자는 이를  “이콘”이라 부릅니다) 지음받은 인간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이 권한의 올바른 이행이 참으로 필요하지만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들의 역사 이야기 속에서는 그 일들을 계속해서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지배권의 찬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신 이후로 노아를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부르셨으며 다윗을 부르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다시금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계속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릴 권한을 위임 받는 이들을 불러오셨습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참 하나님의 ‘이콘’으로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알리셨고, 이것으로 인해 찬탈자들은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교회라 불리우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이 복된 소식인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는 임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완전한 이콘으로서 불완전한 방식으로 불완전한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완벽한 이콘이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의 이콘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한 번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여기서 과연 저자가 정의하는 ‘복음’ 속에서 ‘구원계획’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달이 되어야 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복음을 전할 때에는 ‘죄사함’과 ‘회개’, 그리고 우리의 ‘용서받음’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전하지 않고서 어떻게 ‘회개’와 ‘세례’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진술은 저로 하여금 조금은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맥나이트는 “복음을 선포하거나 전도하고자 할 때 우리는 개인이 구원받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 이야기와 구원계획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하며, 이 차이점은 이 책에 허락된 공간 안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없다.”(p234)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원계획’이 아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하고, ‘구원계획’이 ‘복음’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주장했으면서 즉 ‘구원계획’과 ‘복음’의 차이를 문제로 삼아놓고 그 차이를 논의할 수 없다니!!!!!


저자는 오로지 복음전도(구원계획으로서)는 죄인의 마음만 겨냥하고, 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에만 집착(?)한다고 지적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은 정말로 죄 사함을 약속했고 그것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약속된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저는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분명 그 차이를 말해주고,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복음’, 즉 예수의 이야기 속에서 죄사함의 문제가 어떻게 이뤄지는 가에 대한 논의는 분명 이뤄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이야기의 선포로 그 이야기를 받아들기만 하면 죄사함과 용서가 이뤄진다는 주장은 뭔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저자가 부정적으로 말하는 ‘복음선포’가 아닌 ‘설득’이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물론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고린도전서 15:3의 말씀을 근거로 짧게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뉘앙스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라는 이해에 머물러 있는 듯 느껴집니다. 예수의 죽음이 어찌 ‘우리의 죄를 위한 죽음’이 되는지 그리고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지에 대한 해석이 담긴 설명(예를 들면 히브리서와 같이)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복음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한 체계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복음>자체는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서술적인 선포다.”라는 라이트의 견해를 꾸준히 따르고 있습니다.


더불어 드는 생각은 이야기속에서의 예수만 주장한다면 자칫 우리의 구원자 이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역사속의 ‘예수’ 자체에만 집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오늘날 개인주의적 구원에 치우친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공감이 됩니다.  따라서 ‘복음’을 공동체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타당한 방향제시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은 뭔가 2%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 역시 저자가 말하는 ‘구원계획’에 대한 ‘설득’의 방법과 이야기에 익숙해 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에 응답하는 이들은 구속을 받고, 해방되고,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지만,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에서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구원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이스라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그리고 오직 이 이야기만이 구원한다. 혹은 예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리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사람들이 믿음과 회개, 세례로 응답하게 하고 구원-죄사함, 성령, 새롭게 함,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을 받도록 이끌수 있다.” (p210)


저자가 말하는 위의 진술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질문하게 되네요. “그 이야기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한단 말인가?”  복음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체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계속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네요.  그러기에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계획이 복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과 ‘복음’과 ‘구원계획’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자세하게 진술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이야기과 그 이야기 속에서 예수가 이룬 성취,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복음전도’에 관한 설명, 그리고 ‘구원계획’이 아닌 ‘복음’으로 말미암은 ‘복음문화만들기’에 대한 저자의 설명들은 분명 오늘날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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