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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f Christian

랭던 길키 "산둥수용소" 간단리뷰 본문

생활/영화, 그리고 책

랭던 길키 "산둥수용소" 간단리뷰

christianjin 2014. 11. 13. 11:58



산둥수용소
Shantung Compound
: The Story of Men and Women Under Pressure.

: 랭던 길키 (Langdon Gilkey), 박세혁 역, 새물결플러스, 2014, ~p473


‘본능과 이성 사이의 갈등을 생각해 보다.’ 또한 ‘이기적 삶과 이타적 삶(더불어 살아감)의 간격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  랭던 길키의 <산둥수용소>를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부분도 이 부분이었을까요? 한국어판 산둥수용소의 부제는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배경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당시 중국 북부의 위현(현재는 ‘산둥’)에 위치한 민간인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수용소라고는 하지만 산둥수용소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육체적 고문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없었음을 저자는 말 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들이 수용되었던 곳의 삶은 거의 일상에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물론 위험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저자는 이러한 배경 때문에 이 글을 썼음을 밝힙니다. (p13.)


일상이라 말할 수 있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못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지요.  많은 물질과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던 환경 속에서 우리는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을 무가치하게 여긴다거나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가볍게 여기는 우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무엇인가를 누리고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삶의 토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것과 상관 없이 말하는 ‘가치(가치관)’는 어쩌면 무가치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산둥수용소의 환경이 그러했습니다. 극단적인 어떤 괴로움과 삶의 위협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삶의 기초가 되는 것들에 대해 통제를 받고, 빼앗겼을 때.  더 나은 ‘가치’를 말하고 가르치던 이들도 우왕좌왕하고 방향을 찾지 못하며 무가치하게 여기던 것에 욕심을 부리는 모습들이 드러난 우리네의 모습을 저자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책의 일부분을 보겠습니다.


“ 발전된 문명 속에서 풍족한 음식과 물을 공급받으며 사는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지성적 삶을 선호마며 물질적 가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신발, 담요, 의약품을 생산하는 사람들보다 예술가, 철학자, 시인, 설교가 등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견해가, 물질적인 필요가 너무 완벽하게 채워진 나머지 이 필요 자체가 잊힌 상태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질적인 만족이 위험에 처하면, 물질적인 필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단번에 선명해진다. ” (p145-146)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목회자인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신앙(대부분 신학을 바탕으로 한)에 대해서 말할 때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가? 하고 말이죠. 과연 나는 교우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 실존과 실제를 토대로한 것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맹목적이고 추상적인 관념만을 말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고 있을 때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던집니다.  ‘종교가 현실적 삶을 위해 하는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p150)


저자가 발견한 것은 사람들은 가치,가치관을 토대로 살아가며 그것에 의해 행동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은 가치, 도덕적인 것, 합리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찾아 이득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나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기 위해 도덕적인 이유들, 합리적 이유들을 말한다는 것이죠.   제가 즐겨보는 웹툰 중에 최규석 작가의 ‘송곳’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 중에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대사가 있었어요. “사람이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는 풍경이 달라진다.”  보고자 하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있는 곳에서 보이는 것에 따라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인간은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택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겠죠.


책의 일부분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 사람들이 공평을 외치는 진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저 자기 것을 다 받아내려는 좌절된 욕구였지.” (p262.)


“ 지금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도 기득권자가 되고 나면 아마 자신들의 새로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 될 거야. 이전 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부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할 거야. 결국 정의롭던 사람이 정반대가 되는 거지.” (p265.)


결국 사람들은 도덕적인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적인 것으로 자기를 감추고 위장합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말이죠.  그래서 저자는 인간에게 높은 이상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더 선한 인간을 만들어 내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에게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제공한다고 말합니다. (p220.)


수용소 내에서 그나마 보였던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모습들은 각자 자신들이 배운 가치와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와 자신의 필요를 동등하게 여기는 그런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용소 내에서 보였던 이타적인 모습들은 대부분 권위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고, 자신이 그 권위에 의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한 비관론적인 관점이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 사람들의 실제적인 사회적 행동을 보면 이런 신학적 개념, 즉 우리는 선을 원하지만 의지에 있어서 악하다는 원리가 그 어떤 판단 기준보다 더 잘 우리의 경험을 설명해준다.” (p227.)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가 앞서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해 봐야 합니다. 이런 비관론적인 인간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종교가 현실적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부자의 관점으로 질문을 조금 변형 해 보면 “기독교가 현실적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 부분을 이어가기 전에 저자는 먼저 삶의 모순이 해결되는 것은 더 나은 철학, 더 분명하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방식과 성품의 변화임을 말합니다.(p323.)  이 부분에 대하여 목회자인 저는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결국은 ‘성령’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와의 연합) 살 수 밖에 없고, 성령께서 맺게 해 주시는 열매로 신의 성품에 참여케 되어,  다른 이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며, 이타적인 삶으로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라고 말입니다. 


현실적 삶을 위한 종교의 역할 때문이었을까요? 저자는 종교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을 관찰하며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만 행동양식으로 종교적이다 비종교적이다라고 구분하는 것으로 세속 사회의 종교적인물들, 즉 선하고 경건한 이들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려움을 말 해줍니다.


신부들과 개신교 선교사들 그리고 개신교인들의 세상에 대한 관점과 태도,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행동양식을 비교한 부분에서는 참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이를 비교한 것은 어떤 교리적인 낫고 그렇지 못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경건함(종교적 행동양식)이 아니라 사랑임을 알게 된 것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자가 말한 바에 적극 동의합니다. 


종종 우리는 종교적인 것(신앙)을 말할 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과는 상관 없는 더 나은 것을 바라보려고만 할 때가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직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이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서 존재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관념을 가지고 혼자서 존재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더불어 살아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규범들을 통해 자신이 더 나은 존재임을 드러내며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행동양식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종교’라는 것 자체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속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만일 기독교의 신앙도 이러한 것이 바탕이 된다면 다른 종교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겠지요. 


그래서 저자는 가톨릭 사상의 하나인 “카리타스(caritas)” - 깊은 차원의 자기포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그 사랑을 통한 인간의 사랑을 의미 - 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 진정한 신앙인은 의미와 안정성의 중심을 자신의 생명에 두는 대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 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의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복지가 된다. 이런 신앙은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고, 자기 중심성을 포기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p458.)


우리 인간은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살아갑니다.  삶의 필요를 빼앗기면 그것을 되찾아 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러한 본능 앞에서 도덕적 가치, 종교적 행동양식은 그저 이기적인 자신을 합리화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기적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포기된 존재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더불어 살아감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맛볼 수 있겠지요.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미리 그것을 경험하며 완성 될 그 때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시스템과 어떠한 집단의 행동양식이 아니라 ‘신실한 현존’이 필요함을 말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새물결플러스) 도 생각이 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 인해 이기적 존재가 아닌 이타적인 존재가 되어 함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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