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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기사 논쟁> 간단요약 본문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검색]
빅터 P 해밀턴 外 『창조기사 논쟁 : Reading Genesis 1-2 An Evangelical Conversation』
최정호 역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 493쪽
※ 편안한(대화체)로 요약한 내용입니다(이 글은 2016년에 facebook에 올렸던 글입니다).
논쟁1 - 발제 : 리처드 E. 에이버벡.
창조기사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인식하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음. 창세기의 지명은 실제 지명이며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실존인물이었음을 알려줌. 난 창세기의 구조가설(1~3일은 공간, 4~6일은 공간을 채우는 것들)을 지지함. 즉 창조기사는 고대인의 관점에서 묘사되었지만 실재로 물리적인 창조를 말하고 있음.
논평
토드 S. 비일 :
고대 근동을 다루는 방식은 적절한데..'구조가설'은 좀 아니지 않음?
그리고 창세기가 6일창조를 말하는 것은 실제로 창조가 6일동안 일어났고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임.
C. 존 콜린스 :
아멘.
트렘퍼 롱맨 :
대부분 동의함.6일창조가 일종의 수사장치라고 말하는 것도 동의.
근데 왜 6일패턴은 문자적으로 이해함?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강 이름 두개가 나온다고 해서 '실재'라고 말하는 것은 좀 무리 아님?
존 H. 왈튼 :
기능에 중점을 둔 창조!!!!!!
대부분 동의하지만,방법론에 사용하는 용어들은 좀 나하고 생각이 다른 것 같음.
논쟁 2 – 발제 : 토드 S. 비일
창세기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함. 창세기 1-11장을 해석할 때 왜 통일성 없이 나머지 장들과 다른 해석방법을 사용하는 거임?
게다가 예수와 사도들도 창세기 1-2장을 비롯하여 1-11장 전부를 역사적 사실로 보았음.
최근의 과학이론과 성서본문의 조화를 위해 그런 시도들을 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건 아님!!!
논평
리처드 E. 에이버백.
: 고대근동의 신화문학과 문화를 강조하는 것에 반박하는 건 알겠는데, 근거를 대삼! 그리고 최근에 과학이론에 굴복했다고 말하는데 종교개혁시대의 코페르니쿠스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삼!
C. 존 콜린스.
: “역사성”과 “문자적해석”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거임?
트램퍼 롱맨.
: 나도 창조과정의 하루를 24시간이라고 생각함. 근데 이스라엘은 고대근동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거부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라는 일반화는 잘못된 것임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신앙을 거부해야 했던 것임. 그리고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문자적인 해석도 위험함.
존 H. 월튼.
: 창세기 앞부분의 해석을 달리하는 것은 해석학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의 특성 때문임. 그리고 우린 “비유적 해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음.
님은 전반적으로다가 나랑 좀 다름.
논쟁 3 – 발제 : C. 존 콜린스
메소포타미아 문헌의 전반적인 형태가 창세기 1-11장의 배경을 전해주지만 그것은 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한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문맥은 통일성을 갖고 있음. 특별히 창세기 1-2장의 최종형태는 그것이 서로 다른 두 개의 기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음. 이건 한 단락임. (특별히 2장은 여섯째 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임)
또한 창조의 날들(6일)은 반드시 우주의 시작일 필요는 없음. 그 날들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구를 이상향으로 만드신 기간임. 그러나 이건 1장 3절이후의 이야기이고 창세기 1장1절은 분명하게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음.
논평
리처드 E. 에이버백.
: 오~ 나랑 비슷한데!!! 근데.. 정말로 2:4-25가 1장의 여섯째 날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함?
토드 S. 비일
: 잘 나가다가 뭔소리여!!!! 맥락은 나랑 비슷한데 왜 방법은 다른겨?
트램퍼 롱맨.
: 창세기 1-11장을 전체 속에서 읽어야 하는건 맞는데… 2장을 여섯째날에 대한 설명으로 읽는 건 좀~
존 H. 월튼.
: 일관성에 대해서는 동의!!! 근데 날들을 “유비적 날들”로 보는 점이 나랑은 좀 다름! 그리고 ‘바라’는 블라블라~
논쟁 4 – 발제 : 트렘퍼 롱맨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것과 성서를 모두 같은 장르로 보는 것은 다른 문제임. 성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참되고 일관되지만 전달 방식은 다양함.
성서의 창조기사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창조에 대한 다른 개념들의 배경에 저항하기 위한 이야기임. 그리고 난 유신진화론자임.
논평
리처드 E. 에이버백.
: 지나치게 과학에 물들었군…비유언어로 보는 것은 타당한데 에덴동산과 아담은 역사적 사실이라니까!!! 그리고 유신진화론은 유신론보다 진화론에 더 초점을 맞춘거 아님?
토드 S. 비일
: 나랑 달라도 너무 다름!!! 왜 성경을 말하지 않고 과학을 간과했을 때의 문제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거여~~~
C. 존 콜린스
: “신학적 역사” 가 뭐임? 역사성을 너무 쉽게만 생각하는 건 아님?
존 H. 월튼.
: 나랑 결정적인 차이는 없는데 용어사용이 나랑 쬐끔 다르네~ㅋ
논쟁 5 – 발제 : 존 H. 왈튼
성서를 진지하게 읽기 위해서 첫째, 유능한(competent)독자-시대착오적 질문과 인식을 내세우는 태도를 거부하는-가 될 것. 둘째, 윤리적(ethical)독자 –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으므로 회의주의와 불신앙을 배제 – 가 될 것.
학자들도, 교회 안에서도 유능한 독자는 많지만 윤리적 독자는 별로 없는 것 같음. 우리는 성서의 단어나 개념을 과학에 근거한 우리의 지식에 정확하게 조화시켜려 할 필요는 없음. 물론 문자적 해석 역시 윤리적 읽기를 실패하게 함.
우리는 유능한 독자와 윤리적 독자를 넘어 고결한(virtuous)독자 – 거룩한 텍스트인 성서에 응답하는 – 가 되어야 한다.
고대세계에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즉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것에 기능이 주어짐을 의미할 뿐, 물질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세계(우주)는 성전이다!!!
논평
리처드 E. 에이버백.
: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수용된 것으로 창세기를 읽는 것은 적절하지만, 성서는 고대 근동의 세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맞서고 있기도 함. 그리고 창세기는 분명하게 물질세계를 창조한 것을 말해줌!
토드 S. 비일
: 내가 창세기1-11장에 관련된 책을 200권 이상 읽어봤는데 님처럼 말하는 건 처음 봄. 근데 님의 방법론은 설득력이 없음. 그리고 유능한 독자 어쩌구 하면서 상위컨텍스트와 하위컨텍스트를 구분하는데… 성경은 시공간을 초월하거등!
그리고 물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말은 고대근동의 배경으로 볼 때도 틀렸음.
그리고 님은 말을 너무 어렵게함.(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함)
C. 존 콜린스
: 창세기 1장을 성전건축으로 보는 관점은 훌륭해~!!! 그러나… 너무 기능에만 국한시키지 마삼. 물질도 창조한게 맞잖어~
트렘퍼 롱맨.
: 내 의견과 상당부분 일치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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