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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f Christian

상실앞에서 에로스로 표현되는 존재에 관하여 본문

생활/영화, 그리고 책

상실앞에서 에로스로 표현되는 존재에 관하여

christianjin 2016. 2. 6. 16:18

상실 앞에서 에로스로 표현되는 존재에 관하여.

: 헬무트 틸리케의 성윤리학으로 보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마이크 피기스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헬무트 틸리케 “ 성윤리학 신학적 현상학으로 본 기독교적 성 이해 (SEX: Ethik der Geschlechtlichkeit)”, 김재철 역, 새물결플러스, 2015.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1972.

마이크 피기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Vegas)”, 1995.

 

 

성별은 다음과 같이 인간 존재를 이루는 조건이다. 첫째, 성별은 근원적인 질서를 나타내며(1:27), 비록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타락하여 부패했지만(3:16) 인간의 성별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둘째,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를 나타내는 상징적 가치를 지닌다. 달리 말해 성별은 인간 존재가 항상 다른 인간과 공존한다는 것과, 너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한 명의 너로 정의하는 상징을 부여한다.” , 25.

 

위의 문구로 자신의 책을 시작하는 헬무트 틸리케(이하 저자)는 인간을 존재와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과 기능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것을 비교, 에로스로 나타나는 인간의 사랑도 존재의 측면과 기능의 측면에서 살펴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존재의 측면과 기능의 측면을 완전히 분리해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 측면의 극단적인 것에 대해서는 경고를 합니다.

,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을 생산수단으로 다루며 인간을 '기능인'으로만 대하면 인간을 탈인간화 하고 사물화하며, 반대로 극단적인 자기존재에 대한 자기애의 방식으로만 자기완성을 목적으로 삼고 자기를 실현한다면 인간사회가 올바르게 기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47)

 

저자는 이러한 관점으로 인간의 성에 대해서도 논합니다.

 

존재의 차원과 기능의 차원, 인격적 영역과 생물학적 기능의 영역 같은 두 차원이 서로 결합되어 있고, 두 극단이 서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성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48.

 

, 인간의 성에는 그의 인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사랑을 에로스아가페로 크게 구분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이해한대로 조금 수정하여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의 사랑은 에로스로 표현됩니다. 물론 이 에로스에는 성적인 영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성으로서 사랑이 표현되는 이 에로스에는 서로 다른 동기가 있는데 하나는 리비도(성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입니다.

 

제가 이렇게 정리한 이유는 저자는 에로스를 육체적인 것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에로스와 아가페의 중간상태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에로스는 인간의 본성에 내제하고 있지만, ‘아가페는 그렇지 않기에 인간의 본성적 측면과 그렇지 않은 측면을 구분하기 위해 에로스아가페로 구분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던 그렇지 않은 것이던 인간본성에서 나오는 표현으로서의 에로스가 있기에 저는 이것을 서로 다른 동기에 주목하여 리비도에 근거한 에로스 아가페에 근거한 에로스 두 가지로 구분한 것입니다.

 

저자는 성적인 행동에는 본능적인 것 이상의 것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격(혹은 인격적 특성)’입니다. 본능적인 것만을 좇는다면 그것은 본능적 충동을 해소하는 차원이 되어버리고 이것은 곧 호감과 혐오감의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됨을 경고합니다.

 

저자는 인격과 리비도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81)

 

첫째, 리비도는 순간적인 결합을 목표로 한다. 반면 모든 인격적인 참여는 유대관계를 추구한다.

둘째, 비록 리비도가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두번째에서 말하는 자기 실현은 상대를 대상화함으로 얻는 자기실현입니다. 즉 상대를 통해 쾌락(오르가슴)을 충족하며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고 그 황홀감에 도달하는 것으로 자기자신을 초월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자는 성관계와 인격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며, 구약성경의 경우 성으로 하나가 되는 행위를 배우자를 (내면적으로도)알아가는 것으로서 (יָדַע,야다)’ 이라는 단어로 표현함을 말해줍니다.

 

성의 신비는 성충동의 자극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육체적, 심리적, 정신적, 이지적인 전인(全人)에 관계된다.”, 127.

 

저자는 이후로 남성과 여성이 보이는 성본능의 실현의 차이를 설명하고,(본래 이 점과 관련하여 이안감독의 .(.)’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보려 했으나 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점에 집중하기 위해 생략했습니다.) ‘결혼에 대해서(2)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접하는 한계상황(불임-혹은 피임- ,혼전성관계,낙태,인공수정,동성애)’들에 대해서(3) 설명을 합니다. 이 내용들에 대해서는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본 글에서 리비도에 의한 에로스”, 그리고 아가페에 의한 에로스의 관점으로 두 영화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72년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고, 다른 하나는 마이크 피기스의 1995년작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입니다.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상실을 경험한 남자와 그 남자의 곁에 있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하 파마탱’)’는 미국인 중년인 폴(마론브란도)이 절규하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절규하는 이유는 아내의 자살 때문입니다.

아내의 자살은 그에게 큰 상실을 가져다 줍니다.  물론 이 영화는 19685월의 실패한 파리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안고있고, 여러가지의 복잡한 시대상을 주연인물들(미국으로 대표되는 ’, 유럽사회의 거울 잔느(마리아 슈나이더)’, 자본주의 (장 삐엘 레오)’)로 묘사했습니다. 시대를 인물로 그리고 그 시대의 존재방식을 으로 표현한 점에서 이 영화는 존재를 표현하는 의 차원에서 본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이하 라스’ – ‘라디오스타가 아닙니다)’는 술 때문에 아내가 떠났는지, 아니면 아내가 떠나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지독한 알콜중독때문에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알콜중독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역시 상실속에 있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상실속에 있는 두 주인공 (니콜라스 케이지)’은 각각 한 여자를 만납니다. ‘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잔느, ‘은 라스베가스에서 콜걸생활을 하고 있는 세라(엘리자베스 슈)’’를 만납니다.

 

두 남자는 자신의 상실을 여성과의 관계로 해소해 갑니다. 다만 그 과정과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파마탱은 결혼을 앞두고 집을 알아보기 위해 비어있는 한 아파트를 찾아간 잔느를 뒤 쫓아가 일방적으로 성관계를 맺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여러차례 관계를 갖지만, ‘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고 잔느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장면.  (이미지출처 : Google 이미지검색)


반면 라스에서의 은 세라를 만났을 때 “I’m Ben” 이라고 인사를 건내고, “I’m Sera” 라는 인사를 받습니다. ‘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in ‘H’” 라고 물으며 세라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싶어 하죠세라는 대답합니다. “S.E.R.A. Sera”.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장면. (이미지출처 : Google 이미지검색)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를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김춘수님의 시() “에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도 인간존재가 바뀔 때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셨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져 하나님의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아담이 다른 피조물들의 이름을 붙이게 하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파마탱잔느와의 관계 곧 그녀와의 에로스로 자신의 상실을 해소하려 했지만 그의 에로스는 리비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라스에서의 은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고, ‘세라의 이름을 물어봄으로 그녀와의 관계로 자신의 상실을 해소하려 한 것은 맞지만 그는 리비도가 아닌 그녀의 존재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에로스에는 아가페가 뭍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벤은 세라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여관을 불러서 화대를 지불하지만 그녀와의 성관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의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할 뿐이죠. 이후에 세라가 라스베가스 거리에서 벤을 찾아왔을 때에는 화대를 지불하고 옆에 있어주는 것이아닌, 저녁을 함께 먹자고 데이트신청을 합니다.

 

두 영화는 역설이 담겨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파마탱은 여관을 운영하는 점잖은 중년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낭만의 도시 파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의 이야기는 리비도에 의한 에로스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요.

라스은 알콜중독자로서 가정도 잃고 회사도 잃어버린 채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흥과 쾌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콜걸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속의 의야기는 아가페에 의한 에로스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아닌 존재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파마탱은 쾌락의 극단(가학적인 성행위로의 발전)으로 진행되고, 결국 잔느에게 결혼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녀에게 총살을 당합니다.

잔느는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몰라요”.

 

라스역시 알콜중독에 의해 죽기는 하지만 그의 마지막 죽음 곁에는 세라가 있었고, 그녀와의 결합이 있었습니다.

세라는 말합니다. (이 영화의 명대사죠)

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변화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어요.”

 

헬무트 틸리케는 자신의 책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도 그와 닮은 것을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안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런 성향은 (중략) 타락한 인간에게, 소위 (에로스의 의미에서)더 이상 가치가 없고 더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집중한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 안에 깊게 파묻혀버린 자신의 형상을 사랑하신다. 다시 말해 그분은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을 사랑하신다(중략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그 사랑받을 만한 가치를 창조하는 원인이다. 아가페에 의해 양육된 신뢰도 이미 제시되는 신뢰받을 만한 가치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아가페가 그 신뢰를이끌어낸다.” 우리가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가치가 있다. ,  62~64.

 

인간의 사랑, 곧 에로스는 다른 사람에게 있는 사랑할 만한 가치에 의존한다. 달리 말하면 에로스는 상대방이 가진 아름다움, 성품, 지성과 조화롭게 서로를 보완해주는 상호 보완성 같은 내적 가치에 의존한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소멸적이고 불안정한 것에 의존하며 개정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사랑은 아마도 대단히 승화된 자기사랑의 토대가 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사랑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그 자체가 아니라내게 도움이 되는그의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항상 다른 사람이 내게 중요성을 가졌는지와 그가 여전히 내게 가치를 가졌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사랑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아가페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다른 사람이 가진 가치를 계산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가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 역시 하나님께 가치가 있기에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해야만 한다. 따라서 내 사랑은 매 순간 누군가나를 위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불안정한 기능을 더는 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신실함이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싸고 있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신실함이 나와 그 사람의 관계를 지속되는 관계로 만든다. 그래서 아가페는 다른 사람이 가진 순간적인 적절성과 부적절성이라는 피상성을 뚫고 나아가 그가 가진 궁극적인 신비에 자신을 참여시킨다. , 159~160.

 

 

이상 헬무트 틸리케의 성윤리학으로 보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스베가스를 떠나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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