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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f Christian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리뷰 본문

생활/영화, 그리고 책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1』리뷰

christianjin 2017. 2. 24. 17:11


출처 : 새물결플러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조직신학I』을 읽고.

 

Wolfhart Pannenberg | “Systematische Theologie I” | 신준호안희철 역 | 새물결플러스 | 2017 | 722(~737쪽은 인명색인)

 


출처 : 구글검색.

 

 

위와 같은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기독교의 순환 논리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림인데요.  성경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그 근거를 객관적인 것에 두지 않고 성경자체에 두고 있는 모습에 대한 풍자 혹은 비꼼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를 지나온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며 객관적 사실이해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서구사회는 과거의 한 때 종교일반사회가 구분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분리되는 시기를 맞이하면서 일반사회의 가치로 종교를 되묻는 시기가 왔을 때, 특별히 기독교의 신앙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되물었을 때 교회는 그에 대한 답을 해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썩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자신이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 속에 기독교의 신앙내용을 말해야 했고 그에 따른 여러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를 지나오면서 교회의 경전이었던 성경자체와 성경의 내용도 역사적으로 분석하여서 이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객관적 사실이해를 주려는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을 통해 우리가 새롭게 깨닫고 이해한 사실도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 측면들도 분명히 있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을 그저 고대의 문서들 중 하나로 여기듯이 대하면서 성경의 종교적 권위가 많이 얕아진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성경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기 보다는 특정한 신앙을 공유한 민족과 공동체의 이야기라는 측면으로서만 대하기도 했고 여전히 그렇게 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교회내부에서 조차 성경과 성경내용을 신앙의 근거로 삼는데 의문을 품는 경우가 잦아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배경 내에서 성경의 권위를 다시금 세우고자 한 신학자가 있으니 바로 칼 바르트입니다.

그는 성경(성경내용)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하나님의 계시를 말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교회의 작업을 교의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교의는 성경(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교회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주석은 이성을 사용한 지식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계시의 말씀은 계시에 의해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드러나 있지만 은폐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개념을 자주 이야기 합니다. (선포,성서,계시의 삼중개념)

 

바르트가 말하는 것에 따르면, 맨 앞에서 제시한 그림은 타당합니다. 중간을 이어주는 화살표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하겠죠. 하지만 이것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회내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 ‘성서의 내용계시를 우리가 속해 있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일일까요?

 

제 생각에 판넨베르크(이하 저자’)는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 합니다. 계시가 교회 안의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객관성이 아닌)으로 말해져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학, 교의, 그리고 그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본 책(조직신학1) 1장에서, 그리고 2장에서는 하나님의 개념에 대해서 3장에서는 하나님의 현실성, 4장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5장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삼위일체를, 6장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단일성과 속성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1장 신학.

 

판넨베르크는 신학신에 대한 인식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그 신에 대한 인식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습니다. 과거에는 무엇인가 알 수 없지만 느꼈던 신성을 말하고 노래했다면(감각적)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형이상학(감각이 아닌 사고로서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으로 바뀌었죠.

여기서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말했던 전제, 즉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가 인식 될 수 있도록 자기를 내어준 것을 말합니다.

그 인식 속에서 합의된 내용이 교의(일치를 위한 것으로서)’이지만 이것은 교회의 합의 자체가 아니라 성서내용에 대한 인식의 합의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합의는 계속해서 갱신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성서에 대한 해석은 완결이 아니라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자는 계시에 의한 신 인식은 자칫 개인경험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개인경험은 현대에서 종교심리학의 영역에 갇혀버릴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교의학의 진술들은 하나님의 행동(계시, 성서내용을 통해 말해지는)과 관련이 있으며, 교의학은 하나님의 행동과 관계되어 있는 이 세계에 하나님의 행동을 보편적으로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객관적인 모순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인간의 한계를 말하며 이 모순이 완전히 해소될 때는 세계와 역사의 최종적인 미래의 때(종말과 완성)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관념, 언어, 사상으로 주어진 계시를 다시 그것으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으로 전부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말이죠.

 

 

2. 하나님 개념.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되어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god)’이라는 보편적인 단어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god)’을 말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적인 앎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연신학과 자연종교의 구분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자연신학은 신의 현존뿐만 아니라 신의 특성에 대한 질문을 가리키며 특별히 스콜라 철학과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계시신학의 상대개념으로 등장하면서 자연적을 신의 본성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합니다.

또한 자연종교는 흄의 명제를 빌어서 그 시작이 신에 대한 인식이 아닌 무지, 공포, 희망으로 부터 탄생하게 된 자연의 힘들에 대한 다신론적 찬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하나님/하나님의 행동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인식한 이들의 실증적 종교들 속에서 비로서 현실성을 갖습니다.

 


3. 하나님의 현실성.

 

실증적 종교속에서 이뤄지는 종교행위, 종교현상, 종교적 경험은 그 경험자 개인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그 밖의 객체를 향합니다.

종교본질은 신앙고백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믿는 자에게서만, 혹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사람에게서만 발생합니다(258). 비록 인간성으로부터 인간의 종교적 성향이 감지되고 그것을 통해 신을 인식하게 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종교적 성향으로부터 신의 현 존재는 추론될 수 없습니다(263). 그 신앙의 진실성, 그리고 그 신앙이 고백하는 신에 대한 입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입증은 신이 가진 특성과 행위에 대한 이해로 향합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역사는 이스라엘 자신에게는 세계와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아직 종결되지 않은 미래 전체와 함께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가 되었다. 역사적인 세계 경험을 하나님의 권능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해석들은 되돌아 하나님의 이해 자체에 다시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역사라는 매개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특성들은 점점 더 많이 나타나는데, 물론 그것들은 한결같이 진보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진행되는 사건들은 어둠의 시대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발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주권이 그의 역사적 행위로부터 모든 인간을 향해 결정적으로 계시될 미래를 향하고 있다.” (282~283)

 

여기서 저자가 독자에게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의 현실성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인식의 결과로서)보다 앞서 있다는 점입니다. 근원적인 태초의 시간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종말을 향한)이 열려야 한다는 것이죠.

 


4.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은 오직 그분이 자신이 인식되도록 스스로를 내어주실 때만 인식될 수 있다.” (311)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신성 자체를 나타내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서속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계시의 원천인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체험을 통해 계시를 깨닫게 된 것이죠. 그러나 결국 그 체험을 통해 계시의 원천인 신성을 인식하게 되겠죠. 그리고 이러한 계시는 일회성에 머물지 않습니다.

 

묵시문학을 참조하여 볼 때 계시는 이중적인 형태를 갖는데요 하나는 종말적 미래가 말해진다는 것(미래가 드러남)이구요 다른 하나는 예상했던 것이 적중하는 것(감춰져 있던 것의 현현)입니다. 종합해보면 미래에 대한 것이 현재 개방되었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자가 말하는 이 부분을 인지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 장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현실성, 그리고 이번 장에서 말하는 현재에 개방된 미래의 개념 속에서 아들(예수)을 통한 하나님 자신의 계시(성육신)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계시는 아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계시를 수용하는 인간의 자리(그리스도교, 교회)를 말합니다. 이 자리에서 칼 바르트의 교의 즉, 삼중적 형태의 교의가 유효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계시를 수용하는 자리에 국한되어 있음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저자는 계시사건은 아들에게서뿐만 아니라 역사의 과정속에서도 진행되며 오직 종말이 되서야 완전하게 빛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다만 역사의 과정에서는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조건(예수 안에서 선취된 종말. 미래의 드러남, 감춰져 있던 것의 현현)에서만 공개됨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개념을 인간의 행위에 두는 근대 유럽의 역사 이해 속에서만 생각하는데요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은 역사라는 용어를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했음을 말하며 비록 근대의 역사 이해와 동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행동에 주목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후에 저자는 많은 지면을 할당하여 계시를 말씀에 국한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데요 논의들을 읽어봄직 합니다.

 


5. 삼위일체 하나님

 

앞장에서 저자는 아들에게 나타난 계시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어찌하여 아들 예수가 하나님인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합니다.

저자는 예수를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것은 주의할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스스로도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예수, 아버지인 하나님의 연합은 말해지고 있으며, 이것은 성령이 언급될 때 더 잘 말해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교리,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내적인 관계들에 대한 교회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던 논의들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이 부분들은 직접 읽으시면서 정리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특히 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시면 도움이 될 듯 해요.

 

저 개인적으로 이번 장에서는 단일성에서 출발해서 삼위를 설명하는 것과 삼위에서 출발해서 발견되는 신적 본질의 단일성에 대한 설명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이 개념에서 다음 장으로 논의가 이어집니다.

 


6. 신적 본질의 단일성과 속성들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지성적인 시도는 그리고 그 진술의 제약성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시도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개념으로 시작해서 그런 개념으로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모드 개념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높으심(Erhabenheit)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545)

 

저자는 루터가 말한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과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이중개념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본질은 파악할수 없으나 아들 안에서 발생한 계시를 통해 은폐된 것이 열렸으며(숨어계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 종말에 이르러 완성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폐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한 포기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한속에서 무한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재에 관한 것이며 이 현존재는 저 너머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성 안에 있는 활동적인 현재(Gegenwart)로 이해되어야 합니다(579).

 

4장에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라고 말했듯이 저자는 그 개념 속에서 이번 장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성서의 하나님 이름은 신성의 본질을 위한 문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경험을 지시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이름 자체보다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 속성이 본질을 인식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줌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내제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행위였음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것을(본질 자체가 아니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고는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존재를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 존재와 결합하며, 하나님의 내적인 생명을 경륜적 삼위일체와 결합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속의 경륜 속에서 피조물과 함께하는 아버지, 아들, 영의 활동적 현재다.”

(625)

 

이런 개념 속에서 저자는 영이신 하나님, 세계로의 오심, 하나님과 사랑을 설명해 갑니다.

 

 

마무리.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신학, 신학을 위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 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자리가 되는 현실성, 현실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계시 그 계시 안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속성.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큰 사고의 흐름으로 본 책을 진행해 나간 듯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든 생각이 있습니다.

바르트가 계시를 말함으로 성경과 교회의 정체성을 말했다면,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계시를 부여받은 존재들의 존재방식(비록 종말에 완성될 테지만)을 말한 것 같다는 점입니다.

 

시대의 흐름과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 행하는 치열한 고민들과 사유들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서평을 써 보았습니다만 철학적 개념, 학술적인 표현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쉽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리해 본 큰 그림 속에서 책을 보시면서 판넨베르크가 작업하고 있는 각각의 논의들의 비교와 비판을 살펴보시고 무엇을 토대로 위의 내용들을 말하는지 직접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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