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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함' 과 '확신' - 로널드 L. 넘버스 『창조론자들』 리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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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함' 과 '확신' - 로널드 L. 넘버스 『창조론자들』 리뷰

christianjin 2016. 6. 28. 06:04

불안함’과 ‘확신’


로널드 L. 넘버스, 『창조론자들』, (새물결플러스, 2016)



이 리뷰는 '새물결플러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링크 :  http://hwpbooks.com/?p=4163


[이미지 출처 : 새물결플러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사상과 세계관 등을 적절하게 설명하기도 하겠죠. 문제는 시대와 환경은 계속해서 변해간다는 점입니다. 만일 계속 변하고 있는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지 않고 어느 한 시대에 정립된 사상과 세계관을 설명하는 ‘이론’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상과 세계관은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혹 사상과 세계관을 이루는 그 근간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시대에 따라 그것을 설명, 전달, 접근하는 방식은 유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내용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종종 우리는 ‘믿음(신앙)을 지키는 것’과 그 ‘믿음(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론(방식)’을 지키는 것을 동일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이 갖고 있는 계시의 특별함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자(혹 구두로 전해진 부분이 있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읽고 전해야 했기에)로 기록되었기에 성경이 갖고 있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그것이 기록된 당시의 시대와 환경도 분명히 고려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지키는 것과 믿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론(방식)이 혼돈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해 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널드L. 넘버스(이하 저자)의 “창조론자들”을 읽는 내내 이런 측면에 관한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저자는 창조론과 창조론자들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며, 그저 창조론자들이 해온 일들, 그리고 그들의 삶을 끈기 있게 나열합니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시대적인 구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18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까지 복음주의 진영에는 반진화론운동을 거세게 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오히려 진화론을 수용하고자 하는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1920년대를 기점으로 창조론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면 그것이 대중화를 이루고 폭발적으로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1920년대입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이후에 설명되는 창조론자들에게 발견되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에 생물진화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가졌던 전천년주의자들, 프린스턴 신학교(구 프린스턴), 바이블컬리지(저자는 이와 관련된 것을 ‘무디제국’이라고 말합니다), 소책자 운동, 순회설교자, 스코필드 성경주석 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프라이스를 비롯한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말하고는 있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명칭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근본주의’입니다. 근본주의의 배경을 살펴보시면 위의 명칭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근본주의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무오’, ‘세대주의’, ‘성결운동’입니다. 이 가운데 본 책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성서무오’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1920년대 미국에서 근본주의가 나타난 배경으로는 1860년대에 일어났던 남북전쟁, 미국의 이민사회 등을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 대한 입장과 관련해서 이해할 때 근본주의의 탄생배경은 자유주의신학. 특별히 성서비평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본주의의 입장은 성서비평학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성서무오’를 주장합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우주창조, 생명의 근원에 대한 것도 기록된 성경의 문자적 내용 자체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해가고 과학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내는 상황 속에서, 성경과의 갈등과 긴장은 점차 더해졌습니다. ‘진화론’과 ‘성서비평학’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성서무오’를 지키기 위한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문자적 진술’이 과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오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하나는 과학과 성경의 주장을 조화시키려고 애쓸 때 드러나는 심리적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과 종교의 경계선을 두고 진화론자들과 다툴 때 드러나는 사회적 갈등입니다(33쪽). 저자가 진술하는 창조론자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면 위에서 말한 이 두 가지 갈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과학과 성경의 주장들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쓸 때 그들에게 갈증을 해소시켜 준 인물이 바로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George McCready Price)”입니다. 비록 그가 받은 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은 미흡했지만 그가 말한 “홍수지질학(Flood Geoloy)”은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프라이스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라이스는 진화가 과학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 이론에 반대하는 주된 이유가 ‘철학적 그리고 도덕적’인 것임을 인정했다. 다른 근본주의자들처럼 그는 진화가 기독교 신학과 윤리학을 난장판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정치적 자유도 위협한다고 반복해서 경고했다”(220쪽).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창조론(창조과학)’이 추구하는 목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그에 따른 설명이 아닙니다. 이것이 목표하는 것은 ‘성서무오’에 대한 ‘변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프라이스에 대한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의 배경이 설명 됨과 동시에 그가 왜 이러한 일들을 했는지도 설명이 됩니다. (저자는 ‘제7일안식일’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그들이게 문자적인 6일 창조가 교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론(창조과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창조론자’들의 배경이론이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주된 이야기로 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창조론(창조과학)이 발전해 왔음을 봐야 할 것입니다. 창조론(창조과학)에 대한 관점을 세우거나 이야기 할 때 ‘교파’의 다름이 아닌 성서해석에 대한 입장과 차이를 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도 이후에 창조론(창조과학)이 영향을 끼친 범위에 대해서 국가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개신교를 포함하여 가톨릭, 이슬람, 유대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에게까지 영향을 끼쳤고 그들이 어떻게 창조론(창조과학)을 발전시켜 왔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초기에 창조론(창조과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창조론자들 중에서도 이후에 진화론의 설명을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로 창조론(창조과학)은 놀라울 정도로 세계를 둘러쌉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많은 나라에서 ‘진화론’을 공교육에서 가르치니깐, 이에 대한 종교적 대응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저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말미에서는 두세 줄의 문장으로 이 부분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책의 내용을 통해 독자들은 이렇게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데이비드 왓슨의 말을 빌어 말합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리스와 휘트컴의 책을 통해 확신을 얻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780쪽).


저는 ‘이해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 아닌 변증으로서 ‘과학’을 사용하는 창조론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들려줍니다. 이 때문에 창조론자들은 과학전문가 배출에 신경을 썼으며, 정치적으로는 창조와 진화 모두에 과학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행한 이 ‘변증’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증’은 ‘불안함’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근본주의는 미국사회의 도덕적인 나태함과 이민사회에서 오는 여러가지 사회적 불안함, 그리고 자유주의신학이 보급되면서 사회적 불안함과 결합된 신앙적 위기, 그리고 그에 대한 대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응이 적절치 못했던 부분들도 있습니다. 결국 그 불안함은 다른 종류의 ‘확신’을 강요하게 되고,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확신’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클로츠)는 만일 루터교인들이 문자적 창조론을 포기한다면,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과 같은 중심적 문제들’을 재고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703쪽).


저는 이것이 우리가 그리고 근본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두려움과 그로 말미암아 종종 표출되는 포비아의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문자주의’에 기대어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안주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 불안함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불안함에 대해 대응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들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잘못된 방향설정이 끼친 영향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동시대의 문화와 신앙 사이의 간격에서 불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불안함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을 어떻게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해 할지를 고민해야 하겠죠. “종의 기원” 출간 100주년 기념과 관련된 설명 가운데 저자가 인용한 클레클러의 말에는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믿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학문을 왜곡하는”.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사회적 불안함, 그와 결합된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지성이 밝혀내고 있는 지식(과학지식)과 성경의 문자적 내용의 간격을 점점 더 벌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러한 간격과 그 간격에서 오는 불안함과 위기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문자적 무오설을 내세워 이 시대의 과학과 싸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 밝혀지고 있는 놀라운 결과들을 바라보며 그 너머에(그리고 그 안에,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도적인 창조론자들을 그들의 진화론 편 상대자들과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지성이나 인격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던 우주론과 인식론이었다”(7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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